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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May 25. 2023

28. 인텔리전트 시티 인프라 작전 (2)

서승관 이사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다소 통통하고 선한 눈매 때문인지 날카로운 느낌은 없었다. 치수와 내가 사무실에 올라갔을 때 그는 이미 자리를 잡고 업무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인사를 하면 뭐라도 얘길 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고개를 까딱거려 인사만 받을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잠시 멍하게 서있던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치수를 바라봤다. 치수 역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후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서 이사 맞은편엔 오승일 차장이 앉아 있었다. 그는 현대통신 계열사인  현대솔루션에 근무하다 정주성 전무가 있는 IT조직으로 입사했다. 나름 본인을 ‘통신통’으로 포지셔닝하며 전문가 흉내를 내려했지만 논리나 비판적 사고 같은 컨설턴트로서의 기본 소양은 딱 보기에도 자격미달이었다. 


언젠가 현대솔루션에서 미래 통신기술은 다 경험해 봤다며 설교를 늘어놓다가 김한겸 부장이 실리콘밸리 얘기로 단번에 눌러 버린 통괘한 광경을 보기도 했다. 나로선 정주성 전무 쪽 사람이라고 하니 더욱 반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조금 있으려니 따각따각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허수민 차장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나른하면서도 신비로운 면이 있는 허 차장은 전략 조직의 홍일점이었다. 5년 차 품절녀이긴 했지만 전체를 감도는 생기발랄함과 섬세한 감성 때문인지 소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남들 말로는 차장 진급 전만 해도 사사건건 부딪히며 거침없었는데 차장이 되고 느슨해졌다고 했다. 나와도 몇 번 함께 일했는데 일하는 종종 몽상에 빠져 틈틈이 책을 읽는다거나 몰스킨 노트북에 스케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책은 다소 유치한 로맨스 소설 같은 것들이었고, 스케치는 순정만화에나 나올 법한 중세풍의 아치문과 모자에 흰 깃털을 단 기사 따위였다. 그런 모습에서 알 수 있는 건 현재 그녀에게 업무가 최우선 순위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결과적으로 오승일 차장은 역량이 없었고, 허수민 차장은 의지가 없었다. 프로젝트를 실질적으로 이끌어야 하는 건 치수와 나였다.


10분쯤 지나자 서 이사에게 이메일 한통이 왔다. 오후에 프로젝트 브리핑을 할 테니 현대통신에서 받은 자료를 숙지하고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고개를 내밀고 서 이사 쪽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노트북 모니터에 고개를 박은 채 꿈쩍도 않고 있었다. 오승일 차장은 자리에서 문서를 보고 있었고, 치수는 허수민 차장 옆으로 다가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담소를 나눴다.



‘인텔리전트 시티’ 프로젝트는 통신 기술로 도시 인프라가 어떻게 진화할지 검토하고 통신사로서 사업기회를 찾는 게 목적이었다. 검토 대상으로 선정된 인프라는 에너지, 환경, 물류, 교통, 통신 등 다섯 개 인프라였다. 서 이사의 간단한 개요설명이 끝나자 오 차장이 기선을 잡겠다는 듯 보드 앞으로 나섰다.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은 통신입니다. 현대통신이 가지고 있는 무선통신 기술을 기반으로 다른 산업영역에 얼마나 많은 사업기회를 찾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되는 거죠. 


사실 인프라 별로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은 많이 있습니다. 특히나 4G, 5G 기술로 넘어가면서 IoT, 그러니까 사물인터넷이 활성화돼서 관련된 통신 사업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머신 투 머신이라고 하죠. M2M 네트워크로 사물들끼리 연결시키는 인터넷 기술도 발달하고 있고요. 로컬 단위로 가면 지그비 같은 메쉬 네트워로 사물들을 연결시킬 수도 있죠. 


지금은 초창기라 시장 확산에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런 만큼 시장을 선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걸 개념적으로 보면 이렇게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오 차장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가며 보드에 도식을 하나 그렸다.


음. 열정은 좋은데 이렇게까지 티를 내면서 치고 나와야 하나? 거슬렸다. 우리도 뻔히 알고 있는 통신 용어들을 굳이 하나씩 풀어 얘기하는 모습이 말이다. 허수민 차장은 이미 고개를 돌려버렸다.


“와, 역시 통신사 출신이시라 다르시네요. 이번 프로젝트는 차장 님만 믿으면 되겠는데요.”


치수였다. 통신사 출신이라 다른 게 아니라 통신사 출신이라면 누구라도 알 법한 얘기였다. 게다가 오 차장은 통신사가 아니라 통신사의 IT 자회사 출신이었다. 분명 치수도 나와 같은 생각일 테지만 치수는 오 차장이 정확히 듣고 싶던 말을 해줬다. 그렇다고 거짓이 참이 되는 건 아닌데 말이다. 


사실 어제 이주완 대표가 치수와 나를 불러 이 프로젝트는 ‘통신’ 중심으로 접근해선 안된다고 조언했다. 현대통신 자료를 검토해 보니 그 뜻이 뭔지 알 것 같았다. 현대통신은 내부적으로 수차례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나 통신 관점에서 접근하는데 한계를 느낀 것 같았다. 매번 뻔한 전략과 뻔한 사업기회만 도출됐다. 컨설팅도 그래서 의뢰했던 것이다. 치수도 분명 그 상황을 알아챘을 텐데 왜 오 차장 말에 동의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라도 반격을 해야 했다.


“이렇게 접근하는 게 맞을 까요?”


나지막이 말했음에도 모두의 시선이 단번에 내게로 쏠렸다.


“현대통신이 통신 중심으로 접근하는 걸 원할 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오 차장님이 얘기하신 어프로치가 틀린 건 아니지만 현대통신 자료를 보면 그런 어프로치로는 이미 내부 프로젝트를 많이 한 것 같거든요. 현대통신 B2B 팀에서 진행 중인 사업도 많고요.”


오 차장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감히, 네가 뭘 아냐고 따지듯 눈빛을 쏘아댔다. 하지만 나도 공격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확실한 대안을 제시해서 압도해버려야 했다. 나는 오 차장이 그린 그림 옆에 다른 그림을 그렸다.

“그러니까,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은 통신이 아니라 ‘인프라’인 것 같습니다. 통신 중심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인프라를 산업군에 따라 개별적으로 보는 거죠. 인프라를 통신 사업의 확장영역으로 보면 사업기회도 그만큼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에너지를 에너지 시장 전체로 본다면 1.5조 달러 규모지만 통신과 연계된 시장만 본다면 100분의 1도 채 안됩니다. 단순해 보이긴 해도 이렇게 접근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관점을 바꿔야 했다. 아는 것에서 출발해 확장하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해야 했다. 통신 사업을 안다고 해서, 또 클라이언트가 통신사라고 해서 통신에서 출발하면 뻔한 답 밖에 내놓을 수 없었다. 지식은 편견을 낳고 판단력을 흐릴 뿐이었다.


“성 과장님! 무슨 얘긴지는 알겠는데, 현대통신이 할 수 있는 사업기회가 나와야죠. 그렇게 산업 중심으로만 보면 어디 실행가능한 전략이 나오겠어요? 사업기회가 크다고 현대통신에서 송전망이나 배전망 사업을 할 순 없는 거 아닙니까? 이러면 뜬구름 잡는 소리 밖에 못해요.”


“제가 사업 규모만 보고 실행 불가능한 전략을 짜자고 얘기한 건 아니고요, 프로젝트 접근을 통신 중심으로 가져가진 말자는 겁니다. 현대통신 제안 요청서도 보면 산업 별로 전문적인 시각에서 시장분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프라를 본 후 현대통신이 할 만한 사업을 찾아도 늦지 않습니다.”


“그럼 범위가 너무 넓어요. 12주 프로젝트에서 이 많은 산업 군들을 언제 다 봅니까? 산업 하나만 봐도 12주는 걸리겠네요. 당장 제안서는 어떻게 쓰시려고요? 저희 중에 에너지나 환경 인프라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인력이 있기는 합니까?”


“인력이야 다른 부서에서 도움을 받으면 될 거 아닙니까? 해외 인력도 적극 활용하고요. 저희 강점이 글로벌 펌이란 점인데 해외 인력들하고 논의하다 보면 더 좋은 아이디어도 나올 겁니다.”


“나, 참. 그래서 지금 맨땅에 헤딩하듯 그렇게 해보자고요?”


“저희가 하는 일이 원래 맨땅에 헤딩 아니겠습니까? 컨설팅이 현업 업무하고 같을 순 없겠죠!”


이런. 나도 모르게 너무 쏘아붙였다. 평소 가지고 있던 현업에 대한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버렸다. 현업 출신이란 자격지심에 찌든 오 차장의 치부를 직격 한 것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오 차장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부들부들 떨렸고 서 이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허수민 차장만 싸움 구경을 하듯 느긋한 표정이었다. 아차 싶었지만 내뱉은 말을 주어 담을 순 없었다. 찰나, 입을 연 건 치수였다.


“둘 다 일리는 있는 것 같아요.”


치수는 내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그만하라는 듯 승모근을 두어 번 가볍게 돌렸다. 그리곤 내 손에서 마커펜을 집어 들었다.


“성 과장님 얘기가 일리는 있긴 한데 오 차장님 말대로 조금 현실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성 과장님? 낯 뜨거운 어감이었는데 치수는 너무 자연스레 말했다. 치수는 내게 눈짓을 한번 하고는 오 차장이 그린 그림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수정이래 봤자 음영을 조금 바꿨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산업 관점에서 프로젝트를 봐야 하는 게 맞을 것 같지만 그렇게 접근하는 게 논리적이 다거나 효율적이란 얘기는 아닙니다.”


치수는 ‘논리’와 ‘효율’을 강조하며 오 차장을 쳐다봤다. 오 차장은 치수가 수정한 도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는지 떨리는 손은 팔짱을 끼며 감췄고, 일그러진 면상 위로는 입술을 윽물며 어색한 미소를 만들었다.


“클라이언트 요청이 그러니 맞춰주는 액션은 취하자는 거예요. 저희가 서비스업 아닙니까? 갑이 원하면 해야죠. 그래도 현실적으로 보면 오 차장님 접근이 맞으니 프로젝트 수행은 그렇게 하고요. 


제 생각에도 실질적으로 저희가 사업기회라고 드리 밀 수 있는 건 통신 기반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 저희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밸런스를 잡아야 하는 거죠.”


“내 말이 그 말이에요. 윤 과장님이 이해가 빠르시네.”


오 차장은 바로 맞장구를 쳤다. 나 역시 사업기회를 논할 땐 통신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에 초점을 두는 건 초기 시장 환경을 볼 때 얘기였다. 내 그림에도 산업 별로 세워 둔 기둥 안에 통신 박스가 버젓이 있지 않은 가!


“그래요, 그렇게 실용적으로 접근하는 게 맞겠네요. 초반 포커스는 산업 중심으로 두되 통신을 염두에 두고 분석을 진행하면 될 것 같아요.”


서 이사가 끼어들며 평화협상을 선포했다. 오 차장은 그제야 표정이 풀렸다. 


어라, 이게 아닌데. 분명 내가 애기한대로 결론이 난 것 같은데 어느새 치수가 상황을 정리한 것처럼 돼버렸다. 오 차장은 내게 등을 돌린 채 치수를 붙잡고 사물 인터넷 관련해서 사업기회가 있을 거라는 둥 센서 네트워크가 중요하다는 둥 수다를 늘어놓았다. 


서 이사는 전화를 받으며 나가 버렸고 허수민 차장도 흥미를 잃은 듯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보드 앞에 홀로 서있었다. 멍해졌다. 난 오승일 차장이란 적을 만들었고, 적을 물리친 공적도 취하지 못했다. 돋보인 건 치수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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