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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May 24. 2023

27. 인텔리전트 시티 인프라 전략 (1)


-          얘기 들었어? 이번에 현대통신에서 재밌는 프로젝트 하나 띄웠다는데?

-          무슨 프로젝트?

-          나도 자세한 건 몰라. 무슨 ‘인프라’ 프로젝트라고 그러던데.

-          인프라면 IT 프로젝트 아니야?

-          아, 그 프로젝트 나도 얘기 들었어. IT는 아니래. 전략이라 그러던데.

-          전략 맞아. 그 인프라가 IT인프라 같은 게 아니라 에너지, 환경, 물류 그런 도시 인프라야. 제주도에 ‘인텔리전트 시티’ 실증단지를 만드는데 그 전략 짜는 프로젝트라고 하더라고.

-          인텔리전트 시티? 재미있겠는데!

-          TO는 있대?

-          지금 제안서 작업 중인데 차장 2명은 이미 배정됐고 주니어로 2명 정도 더 뽑는데.


동기들이 모여있는 단체 대화방 메신저 창으로 빠르게 대화가 오갔다. ICT 세미나를 진행한 지 4개월 만에 발주된 현대통신 ‘인텔리전트 시티 사업전략’ 프로젝트 얘기였다. TO는 2명이 맞았지만 대상자들은 이미 내정돼 있었다. 나와 윤치수였다. 


2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그에게 투정 부리듯 입사 연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같은 ‘과장’ 계급장을 달고 프로젝트에 투입된다고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치수와 함께 이번 프로젝트를 하는 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조기진급이 확정되고 제일 처음 알아본 게 MBA 프로그램이었다. MBA 프로그램은 전략 조직 차장, 과장에게 우선권이 부여됐는데 현재 대상자는 치수와 나 두 명이었다. 하지만 같은 과장이라도 연차로 보면 치수가 위였으니 우선권은 치수에게 있었다.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치수가 지원한 학교에 모두 떨어지거나, 임원들이 만장일치로 치수 대신 날 추천하는 케이스 두 가지가 전부였다. 둘 다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경쟁관계에 있는 건 MBA 뿐이 아니었다. ICT 세미나 후 어센트는 최고의 인력으로 현대통신 전담팀을 구성해 운영할 계획이었고, 미국을 비롯해 해외 전문가들도 우선 투입할 수 있도록 글로벌 사무소와 공조했다. 전담 팀원이 된다면 통신분야에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을만한 프로젝트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였다. 차장 조기진급까지 노려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전담 팀원 자리 또한 치수와 내가 경쟁해야 할 자리였다.


제안서 작업 첫날, 난 치수와 어센트 건물 옆 커피숍에서 만났다. 프로젝트에 들어가기 전 작전회의 좀 하자는 게 치수 얘기였다. 커피를 시켜 놓고 조금 기다리니 손을 번쩍 치켜들고 싱글벙글 웃는 치수 얼굴이 보였다. 대학 때나 지금이나 치수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웃는 얼굴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풍겨 주위엔 항상 사람들이 몰렸다. 


하지만 그게 그냥 되는 건 아니었다. 그에겐 본능적으로 자신을 낮춰 상대를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 그러면 내 말을 들어줄 것 같고, 그에겐 내 고민을 얘기해도 될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활용할 줄도 알았다.


“역시 아이스아메리카노는 커피빈이 제맛이야. 이 잘잘한 얼음 씹어 먹는 맛이 있거든.”


치수는 플라스틱 컵 뚜껑을 열어 얼음째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대학교 때부터 습관이었다. 얼음이 잘잘하건 크건 그는 한 입 가득 얼음을 부어 넣고 아작아작 씹으며 순식간에 커피 한잔을 끝냈다. 


한 여름에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만 천천히 식혀 마시던 나와는 정 반대였다. 술과 사람을 좋아했고, 시험이 하루 앞에 다가왔어도 무조건 땀을 빼야 한다며 농구공이던 축구공이던 들고 뛰쳐나갔다. 


나와 어울릴만한 구석이라곤 도무지 찾을 수 없었지만 우연히 같이 듣게 된 ‘그리스 고전 철학’ 수업을 계기로 친해졌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중 누가 맞을지 고민하던 내게 도토리 키재기라며 프로타고라스를 내밀곤 했다. 진리란 절대적인 게 아니라 논쟁과 토론을 통해, 그러니까 어떤 민주적 절차를 통해 협의되는 상대적인 거라고 말이다. 그런 그의 성향은 정치학과 심리학을 복수 전공한 선택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던 나와는 맞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사고 근저에 깔린 지식과 발전에 대한 열망은 놀랍도록 나와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우린 사사건건 부딪히며 열 띄게 논쟁했고, 그런 순간들이 경쟁심과 친밀감으로 버무려진 묘한 우정으로 발전했다. 


돌이켜보면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와 내가 근본적으로 가는 길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제 같은 길을 가게 된 상황에서 우리 관계가 어떻게 바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길이 둘이 함께 갈 수는 없는 좁은 길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무슨 작전회의를 하자는 거야? 따로 뭐 들은 거 있어?”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얼굴이나 좀 보자고 불렀어. 본지 오래됐잖아.”


그냥 부른 건 아니었다. 치수에겐 분명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아마 그의 성격상 오래 참고 있진 못할 것이라 생각했고, 역시나 그는 내가 커피 몇 모금을 채 마시기 전에 얘길 꺼냈다.


“이번 프로젝트 잘 돼야 하는 거 알지? 내년에 대표님 은퇴라서 형님들 눈칫싸움이 장난이 아니시다.”


“그래? 대표 은퇴하고 이번 프로젝트하고 무슨 상관이야?”


난 몰랐다는 듯 대꾸했지만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내년이면 한국 사무소 총괄 대표가 은퇴한다. 그 자리를 메꿀 수 있는 사람은 이주완 대표와 김승일 대표 그리고 이연희 대표다. 이주완 대표는 전략, 김승일 대표는 금융 및 공공 산업, 이연희 대표는 에너지와 소비재 산업 담당이었다. 


이연희 대표는 한 발치 뒤에서 관망하는 스타일이라 쉽게 경쟁에 끼어들 것 같진 않았다. 아마도 이주완 대표나 김승일 대표 중 한 사람이 승기를 잡으면 그쪽을 지지할 것이다. 대표로서의 자질이나 역량을 본다면 이주완 대표가 한 수 위라는 평가가 많았다. 특히 전략이라는 부서 특성상 산업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C레벨 임원과 두루두루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주완 대표는 직속 인력이 부족했다. 휘하에 인력이 적다 보니 존재감이 부족할 수 있었다. 반면 김승일 대표는 올라운드 플레이어 였다. 특히 금융 쪽에는 금융 시스템 구축을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 팀이 많아 직속 인력 수로만 따지만 압도적으로 1위였다. 그래서 사실상 승기는 김승일 대표 쪽으로 기울었다는 게 중론이었다.


“이번 프로젝트가 차기 대표선출에 키야. 지금 국내 3대 통신사 중에서 어센트가 뚫지 못한 데는 현대통신 하나거든. 이 어카운트를 누가 잡느냐에 따라서 대표가 결정될 수도 있다고.”


“총괄대표는 김승일 대표로 내정된 거 아니었어? 다들 그렇게 얘기하던데.”


“야 인마. 너 전략소속 맞냐? 남 얘기하듯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지.”


난 사실 치수의 이런 면이 싫었다. 치수는 어떤 상황에서건 편 가르기를 했다. 항상 자기편과 남의 편 사이 경계를 그었고 그 경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에 따라 행동을 다르게 했다.


“그래도 경쟁이 안 되는 거 아니야? 전략이래 봤자 우리 팀은 30명이 전부인데 김승일 대표 밑으로는 100명도 넘게 있잖아.”


“전략 단독으론 안 되겠지.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가 중요한 거야.”


“왜?”


“금융 팀 사이즈하고 맞짱 뜰 수 있는 팀이 또 어디겠냐? 정주성 전무 쪽 IT팀이잖아. 이번 프로젝트로 현대통신 어카운트를 뚫게 되면 여기서도 대한통신 같이 굵직한 IT 프로젝트가 쏟아져 나올 거야. 그럼 이주완 대표가 레버리지가 생기겠지. 정주성 전무팀을 키워주면서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레버리지 말이야.”


정주성 전무 조직은 70명 정도였다. 치수 말대로 그가 어디로 붙느냐에 따라 판도는 바뀔 수 있었다. 하지만 정주성 전무는 양날의 검이었다. 그가 IT 프로젝트로 주도권을 잡게 되면 오히려 전략의 입지는 좁아질 수도 있었다.


“근데 정주성 전무가 우리 쪽으로 붙는 게 꼭 우리한테 유리한 거야? 정 전무라면 이주완 대표 뜻대로만 움직여 줄 것 같진 않은데. IT만 챙기는 사람이라 우리하고 어젠다가 같지도 않을 거고 말이야.”


순간 치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재미있다는 듯 날 쳐다봤다. 실험실 기니피그를 관찰하듯 말이다.


“오, 성세윤! 많이 발전했는데. 그런 생각도 하고 말이야. 근데 이미 게임은 시작된 것 같다. 이번 프로젝트 담당이 누군지 알지?”


“서승관 이사잖아.”


“원래 이번 프로젝트 담당으로 거론되던 사람은 임정혁 부장이야. 그런데 왜 서승관 이사를 넣었겠어?” 


서승관 이사는 평판이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올해 가장 중요하다고 하던 현대통신 프로젝트를 맡을 만큼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전략팀에 이 프로젝트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당연히 임정혁 부장이 프로젝트를 맡는 게 맞았다. 임정혁 부장 대신 서승관 이사가 투입됐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서승관 이사가 정주성 전무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하고 제일 싫었던 말이 ‘라인’이니 ‘누구누구 사람’이니 하는 단어들이었다. 그래서 그런 걸 특히나 중요시하던 정주성 전무가 싫었다.


“난 그런 거 몰라.”


창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치수는 미소와 냉소의 중간쯤 되는 애매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알았다. 여하튼 그래서 불렀어. 잘해보자고 말이야. 너나 나나 살아남으려면 이 프로젝트가 잘 돼야 해. 김승일 대표가 총괄대표가 되면 최악이야.”


흘려듣는 척했지만 치수 말이 맞았다. 김승일 대표가 총괄대표가 되면 모르긴 해도 전략 조직을 그냥 두진 않을 것이다. 이주완 대표와 앙숙이어서 그런지 평소 전략 조직을 폄하했고, 전략을 별도 조직으로 둘 필요가 있냐며 공공연히 말했다. 어센트가 맥킨지나 BCG 같은 전략 전문 펌이 아닌 이상 전략은 산업 조직 내 소파트로 두는 게 맞다고 본 것이다. 


문제는 정주성 전무도 전략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잠시 이주완 대표를 지원할진 몰라도 결국 그는 IT 중심으로 자신의 어젠다를 추진할 것이다. 그의 행보를 생각하면 이주완 대표를 허수아비 대표로 두고 자신이 전략 조직을 장악하려 들 수도 있었다. 


그래서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김승일 대표가 총괄대표가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와 이주완 대표가 정주성 전무와 동맹을 맺는 차악의 시나리오만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정작 내게 걸렸던 건 ‘잘해보자’는 치수의 말이었다. 잘해보자. 거기엔 묘한 뉘앙스가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가 잘 돼야 하니 따로 놀지 말고 자신에게 협력하라는 건가? 하지만 그와 같이만 일해선 나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다. 같은 과장이라도 치수가 연차가 높은 이상 같이 일을 하게 되면 치수가 돋보이게 된다. 나도 나 자신만의 성과라고 할 만한 공적이 필요했다. 


나에게 중요한 건 총괄대표 보다 MBA지원을 누가 받고 차장 진급을 누가 하느냐였다. 내키지 않아도 치수와 내가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려면 협력해야겠지만 결국 승자는 한 명이다. 빈틈을 보여선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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