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투드라길, 푸른 협곡의 기억

by 성세윤

스톡스네스를 지나 향한 다음 목적지는 에이일스타디르였다. 숙소를 예약해 둔 마을이었다. 일단 도착해 짐을 풀고 일몰에 맞춰 스투드라길로 향할 계획이었다. 아침 일정이 다이아몬드비치에서 스톡스네스로 바뀐 덕에 시간은 충분했다.


링로드 양옆으로는 현실이라 믿기 어려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쪽엔 눈 덮인 들판이 끝없이 펼쳐졌고 그 뒤로 검은 절벽과 빙하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나누듯 줄지어 서 있었다. 반대편에는 푸른 대서양의 파도가 수평선 너머로 밀려오고 있었다.


DSC07039.jpg
DSC06950.jpg


해안도로는 뱀처럼 길게 휘어 있었다.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차는 곡선을 따라 오래된 멜로디 라인을 따라가듯 아치를 그리며 부드럽게 움직였다. 도로 위엔 다른 차가 한 대도 없었고, 해안으로 부서지는 바람 소리만이 유일한 동행이었다.


들판 끝을 따라 이어진 지형선을 넘자 다시 수평선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은 바다처럼 흘렀고 파도는 언덕처럼 솟았다. 바위처럼 단단한 세계와 바람처럼 가벼운 세계가 동시에 존재했다. 두 세계는 모순을 안은 채 공존했고, 그 풍경은 현실과 꿈, 일상과 여행, 출발과 도착 사이의 흐릿한 경계와 닮아 있었다. 나는 그 모호한 경계 위를 걷고 있었다. 잠든 세계의 틈새를 따라 꿈을 꾸듯 여정을 이어다.




그러다 문득 해안가에 검은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뭐지? 생각할 틈도 없이 뷰포인트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반사적으로 핸들을 꺾었다. 오십 미터쯤 내려가자 검은모래 해변 위에 거칠게 솟은 주상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휴게소 샛길로 빠졌을 뿐인데 숨은 비경을 만난 것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급히 찾아보니 ‘파우카산덜’이라는 이름의 주상절리였다. 여행 전 인터넷에서 보긴 했지만 디르홀레이와 비슷한 모습이라 굳이 일정에 넣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이야.


DSC06954.jpg


디르홀레이처럼 거대한 절경은 아니었지만, 작은 검은 해변에 우뚝 선 주상절리는 마치 잊고 있던 내면의 소리를 들려주는 작은 재즈바 무대 같았다. 전망대 쪽으로 다가가자 주상절리를 더 가까이 더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주상절리는 마치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는 구조물처럼 보였다. 수직으로 솟아 하늘을 향한 그 돌기둥들은 시간의 층위를 머금은 채 굳어 있는 것 같았다. 내 시선이 그 기억을 깨우는 것처럼 묘한 울림을 느꼈다.


그때 마법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구름 뒤에 숨어 있던 태양이 얼굴을 내밀자 강렬한 빛줄기가 바위를 덮기 시작했다. 조명이 무대 위에 내려앉듯 빛은 주상절리의 머리 위를 감싸더니 반짝이는 윤슬과 함께 몸통 전체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DSC07028.jpg
DSC06995.jpg
DSC07023.jpg


그것은 고요한 몸짓이자 무위의 춤이었다. 빛을 받았을 뿐인데 돌기둥은 오래된 책 속 문장처럼 나와 교감했다. 나라는 단 한 사람의 관객을 위해 돌기둥은 기꺼이 무희가 되어주었다.




스투드라길로 향하려면 링로드를 벗어나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야 했다. 예상과 달리 길은 잘 정비되어 있었고 눈길이나 웅덩이도 없어 운전은 어렵지 않았다. 20분쯤 들어가자 주차장이 나타났다. 주차된 차는 내 차를 포함해 세 대. 끝자락엔 안내판과 함께 계곡으로 내려가는 철제 계단이 있었다.

첫 발을 딛자 철판이 ‘텅’ 하는 소리를 내며 계곡 아래로 울려 퍼졌다. 계단이 가팔라서인지 내려가는 동안은 마치 한 층, 한 층 세계의 지층을 넘나드는 기분이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곧게 솟은 주상절리 절벽과 그 사이 숨겨진 계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골든아워가 가까워지며 풍경의 농도도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진회색 현무암 절벽은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계곡물은 에메랄드색으로 빛났다.


DSC07086.jpg
DSC07125.jpg


전망대에 다다르자 바람을 타고 아이들의 울먹임과 웃음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한 아이는 무섭다며 난간을 붙잡고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이지 못했고, 다른 아이는 그런 동생을 겁쟁이라 놀리며 철제 바닥을 텅텅 울리며 뛰어다녔다. 아이들을 따라온 부부는 다급히 손짓을 했지만, 흥이 난 아이를 말리긴 어려워 보였다. 그들 뒤로는 연인들이 계곡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하지만 소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금세 계곡의 고요함에 스며든 듯 조용해졌고, 연인들도 몇 컷 사진을 찍은 뒤 계단 위로 다시 올라갔다. 느낌이 좋았다. 이제 남은 일몰 시간 동안 전망대를 혼자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전망대가 다시 울렸다. 두터운 아웃도어 복장에 커다란 레오포토 삼각대를 맨 커플이 내려오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사진을 찍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재빨리 전망대 끝으로 가 삼각대를 펼쳤다. 계곡이 가장 아름답게 담기는 단 하나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들도 그 자리를 탐내는 눈치였지만, 이내 포기한 듯 전망대를 한 바퀴 돌고는 돌아섰다.

옆으로 조금 비켜줄까? 비좁긴해도 삼각대 하나 정도는 더 놓을 수 있었다. 물어만 봤다면 충분히 비켜줄 의향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포기했는지 발길을 돌렸다.

그냥 가는 건가? 그 정도 장비를 갖췄다면 한 컷쯤은 찍고 가야지, 하는 못된 생각도 들었다.


어찌됐건 덕분에 전망대엔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해는 계곡 반대편으로 넘어가고 있어 그 장면을 직접 담을 수는 없었지만, 혼자 여유롭게 주변 풍경을 찍는 일도 나쁘진 않았다.


DSC07118.jpg
DSC07120.jpg
DSC07100.jpg


그렇게 4, 50분 쯤 전망대를 독차지하고 어떻게 하면 해를 좀 더 오래 담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문득 계곡 건너편 언덕에 움직임이 느껴졌다. 빨간 가방이 눈에 띄었다. 아까 그 커플이었다. 그들은 계곡을 돌아 반대편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그 방향은 해가 넘어가는 위치와 정확히 일직선이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저길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하수라고 비웃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부끄러워할 틈도 없었다. 길을 찾아야 했다. 계곡을 샅샅이 훑었지만 건너갈 수 있는 지점은 보이지 않았다. 급히 구글을 찾았다. 협곡을 따라 내려갔다가 반대편으로 오르는 트레킹 코스가 있었다. 차로 10분 거리. 지금 서두르면 일몰 전까지는 도착할 수 있었다.


짐을 챙겨 계단을 뛰어올랐다. 허벅지가 터질 듯 당겼고,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숨 고를 틈도 없이 차에 올랐고 바로 도로를 따라 달렸다. 5분 후 협곡 너머로 이어지는 다리가 나타났다. 하지만 다리를 건너자마자 커다란 바리게이트가 길을 막고 있었다.

‘겨울철 통행금지.’

젠장. 10분 거리가 아니었다. 조금 전 그 커플이 50분이 지나서야 반대편에 나타난 이유가 있었다.

해는 이미 협곡 끄트머리에 걸려 있었다. 바리게이트에서 주차장까지 2km, 주차장에서 다시 계곡까지 3km. 평지지만 장비를 짊어진 채 5km를 30분 안에 도달하려면 전력 질주 외엔 방법이 없었다.

달렸다. 자갈이 튀었고 맞바람은 옷깃을 찢었다. 땀은 머리부터 떨어졌고 몸은 기관차처럼 뜨거운 증기를 내뿜었다. 하지만 뭔가를 향해 달리는 건 오랜만에 느껴보는 명확한 감정이었다.

해는 어느덧 산비탈 너머로 낮게 가라앉고 있었다.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었고 산등성이를 따라 새나온 빛줄기가 풍경을 금빛으로 채색했다.


DSC07166.jpg
DSC07170.jpg


얼마나 달렸을까? 전망대 맞은 편에 도달할 즈음 온 몸이 땀으로 젖었다. 들숨과 날숨은 서로를 밀어내듯 엉켜 버렸다. 입은 벌어지고 어깨가 들썩였다. 심장은 가슴을 밀어낼 듯 뛰었고 뜨거운 피가 귓바퀴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바로 눈 앞에 상상했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DSC07172.jpg
DSC07176.jpg
DSC07271.jpg


수천 개의 현무암 기둥이 마치 고대 신전의 기둥처럼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다. 황혼이 시작되며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시간의 무게와 지질의 기억을 담은 듯한 깊은 저녁 어스름이 세상을 덮었다. 언덕 너머 바위 위에 앉아 저무는 풍경을 담고 있는 커플의 모습도 보였다. 나도 자리를 잡고 풍경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DSC07213.jpg
DSC07179.jpg
DSC07236.jpg


풍경을 담아낼수록 구도가 아쉬웠다. 곧게 솟은 주상절리를 제대로 보려면 계곡 밑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러나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힌 돌계단은 빙벽처럼 가파랐다. 아이젠을 끼고 있었지만 엄두가 나질 않았다. 크램폰과 아이스 툴 정도는 있어야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걸음 다가 가보려 시도는 했다. 하지만 발끝이 미끄러지고 등골에 싸늘함을 두어 번 느낀 뒤로는 바로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였다. 겨우 몇 미터. 하지만 그 몇 미터를 나는 넘지 못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풍경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 그 풍경 안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 사이엔 언제나 단절이 있었다. 아주 작고 조용하지만 분명한 단절. 그리고 그건 나와 세상 사이에도 늘 존재해왔던 것이다.

얼마나 많은 순간, 나는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주저앉았던가. 얼마나 많은 순간, 손을 뻗지 못한 채 돌아섰던가. 무모와 도전 사이에서 갈등하며 끝내 머뭇거렸던 수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옳고 그른 건 없었다. 그저 내 선택과 선택에 따른 결과가 있을 뿐이었다.

서쪽 전망대에서 동쪽 전망대로 뛰어 온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고, 계곡 아래로 내려가지 않기로 한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다. 선택으로 인해 보게 된 풍경과 보지 못한 풍경이 상상 속에 뒤섞였다. 주상절리 무대 위로 보랏빛 장막이 드리워지며 하루가 끝나고 있었다.




이동경로

ㅁㄵ.png

파우카산덜: Fauskasandur

스투드라길 (서쪽): Studlagil Parking

스투드라길 (동쪽): Stuðlagil (East Side Parking) - Klaustursel

스투드라길 (다리): Stuðlagil (Bridge parking)


뷰포인트

ㅊㅍㅊ.png

스투드라길은 서쪽 전망대와 동쪽 뷰포인트 양쪽에서 볼 수 있다. 방향에 따라 다른 주차장에 주차해야 하고 거리는 10km 정도 떨어져 있다. 동쪽은 전망대가 따로 있는 건 아니고 계곡 위에서 뷰를 조망하게 된다.

겨울에는 다리 주차장에서 동쪽 주차장까지 비포장도로를 개방하지 않는다. 실제로 도로 전체가 얼어 있는 구간도 꽤 많아 위험하다. 그래서 동쪽 뷰포인트까지 가려면 다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걸어가야 한다. 다리 주차장에서 동쪽 주차장까지 2km, 동쪽 주차장에서 뷰포인트까지 3km 해서 5km 정도 된다.

계곡 쪽으로 갈수록 얼어있는 구간이 많아 아이젠은 필수다.

keyword
이전 19화스톡스네스, 검은 산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