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변덕스런 아이슬란드 날씨라도 이틀 동안 머물며 일출 한 번쯤은 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가장 보고 싶었던 풍경은 다이아몬드비치의 일출이었고, 그래서 유일하게 2박 3일의 여유로운 일정을 그곳에 배정해두었다. 요쿨살론에서 오로라를 보며 돌아오던 그 순간까지도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흐르고 있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돕는다는데, 이깟 날씨 하나쯤 안 도와주겠는가.
하지만 차로 돌아와 일출을 기다리는 동안 별빛은 점점 희미해졌다. 날이 밝아와서가 아니었다. 동쪽에서 밀려든 구름이 하늘 위에 커다란 암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다시 확인한 예보는 절망적인 미래를 암시하고 있었다. 구름 무리가 정확히 해가 떠오를 시간에 다이아몬드비치를 뒤덮을 예정이었다. 또다시 하늘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날씨의 희생양이 될 생각은 없었다. 해가 뜨려면 아직 두세 시간은 남았다. 곧장 구글맵을 열고 동쪽을 훑었다. 회픈을 지나 스톡스네스 해변 끝자락까지 가면 그나마 일출을 볼 수 있을 가능성이 보였다.
스톡스네스는 원래 일정에 없던 곳이었다. 뾰족한 봉우리의 베스트라혼 산이 인상적이긴 했지만, 다음 목적지인 스투드라길까지 일몰 전에 도착하려면 도저히 여유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이아몬드비치를 포기한다면 스톡스네스에서 일출을 보고 스투드라길로 향해도 시간은 충분했다.
문제는 스톡스네스 역시 날씨가 좋으리란 보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스톡스네스 해변까지 갔는데 거기도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어면? 그리고 그 사이 다이아몬드비치 날씨는 개어버리면 어쩌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제 아이슬란드 여행 6일째. 아무리 분석하고 경우의 수를 따져봐도, 결국엔 아이슬란드가 보여주는 풍경만 볼 수 있다는 건 이미 깨달았다. 이럴 땐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파도에 몸을 맡기듯 표류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생각이란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매번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시간 날씨를 확인하고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를 풀듯 최적의 경로를 그려볼 수 밖에 없었다.
순간 기시감이 몰려왔다. 여행 첫날, 스나이펠스네스반도로 갈지 골든서클로 갈지를 두고 머리를 싸맸던 기억이 떠올랐다. 몇 날 며칠 감동을 주는 풍경을 보고,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는 변하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중요한 건 균형이었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 단순한 진리를 다시 떠올리자 머리가 맑아졌다. 더 이상 고민은 필요 없었다. 시동을 켜고 동쪽으로 향했다.
회픈을 지나 스톡스네스 해변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여전히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평선 위로 붉은 실선이 희미하게 그어지며 여명의 시작을 알렸지만, 해가 구름을 뚫고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풍경은 아름다웠다. 블루아워의 막바지, 대기는 깊은 푸름에 잠겨 있었다. 너무도 짙고 선명한 파랑이었는데, 이토록 투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푸른 대기 속에서 뿔을 세운 악마처럼 베스트라혼 산이 솟아올라 있었다. 회색빛 바위산은 새벽의 정적을 끌어안으며 묵직한 무게감을 더했다.
그때 적막을 가르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세 명의 사진가가 삼각대를 짊어진 채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머물던 자리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들은 주저 없이 나를 지나쳤고, 나도 본능적으로 그들을 따라갔다.
언덕 하나를 넘자 검은모래 해변이 펼쳐졌다. 아, 여기구나. 베스트라혼의 반영이 검은 모래 위로 펼쳐지는 명소. 몇 시간 전 급히 정한 목적지라 유명한 스팟을 눈 앞에서 놓칠 뻔했다.
황급히 해변 한켠에 자리를 잡고 뷰파인더 가운데로 베스트라혼을 넣었다. 그러나 거센 파도 탓에 반영은 아지랑이처럼 흩날렸다. 어느덧 블루아워의 푸른 빛도 사라지고, 풍경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다. 잠시라도 구름이 걷히길 바랐지만 아무리 시선을 옮겨봐도 마음에 드는 구도는 잡히지 않았다.
그때였다. 안개구름이 베스트라혼을 집어삼킬 듯 밀려들었고, 휭 하는 바람과 함께 눈송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뭐야? 또 눈이야? 예보엔 없던 기습적인 눈이었다. 그 순간, 눈송이 사이로 세 사진가의 실루엣이 뷰파인더 안에 들어왔다.
잿빛 실루엣의 베스트라혼은 마치 연극 무대의 배경처럼 서 있었고, 검은 모래 위 세 사람은 무대에 올라선 관객처럼 보였다. 흩날리는 눈은 장막처럼 둘 사이를 갈랐다. 이질적인 풍경이었지만 이상하게 매혹적이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아무도 없는 이 해변에 서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무엇을 위해 그들을 담고 있었을까?
10분 정도 지났을 까. 눈보라처럼 쏟아지던 눈송이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구름이 조금씩 희미해지는가 싶더니 감춰졌던 베스트라혼의 봉우리가 드러났고 반대편에선 햇살이 구름을 비집고 나와 베스트라혼을 비치기 시작했다.
이미 해는 떠 있었기에 이틀 전 로마그누푸르에서 보았던 것처럼 드라마틱하진 않았다. 그러나 햇살을 받은 반려암은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남겼다. 잔잔해진 파도 덕에 물에 비친 산의 반영도 한층 또렷해졌다.
블루아워의 신비로움, 안개로 뒤덮인 음울함, 눈송이 흩날리는 낯섦, 햇살을 머금은 화사함까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 모든 풍경을 한 곳에서 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돌아보면 모든 것이 우연이었다. 계획대로 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우연히 다이아몬드비치를 포기했고, 우연히 스톡스네스를 택했고, 스쳐 지나던 세 사람을 본능처럼 따라왔고, 눈이 내리는 순간 그들을 프레임에 담았고, 햇살이 비추는 장면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
삶은 우연의 연속이다. 무작위의 사건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손을 뻗어 지푸라기 하나를 붙잡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휩쓸리며 손에 쥔 작은 조각들이 쌓이면 언젠가 하나의 부유물이 되고, 그 위에서 다시 다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다이아몬드비치에서의 일출은 끝내 보지 못했지만, 스톡스네스의 변화무쌍한 베스트라혼은 우연으로 직조된 한 폭의 환영같은 풍경으로 내 안에 깊이 새겨졌다.
그 기억 한 조각은, 삶이라는 바다를 건너는 언젠가의 순간에 분명 한 줌의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삶이란 실로 얼마나 다채로운 우연의 연속인가. 그리고 그 안에서 기억할 만한 한 순간을 포착하는 일이란, 얼마나 뜻 깊은 일인가.
이동경로
바이킹카페: Viking Cafe & Guesthouse
스톡스네스: Stokksnes Parking
스톡스네스해변에 가려면 우선 바이킹카페에서 티켓을 사야한다. 카페가 열려 있으면 카페에서 사면 되고 닫았으면 밖에 있는 무인발권기에서 구매하면 된다.
스톡스네스해변으로 향하는 길 앞에 있는 차단기에 티켓에 있는 QR코드를 대면 된다.
뷰포인트
바이킹카페에서 도로 끝에 있는 주차장 #1까지는 1.7km 정도다. 가는 길목에 주차장 #2와 #3도 있는데 어디에 주차해도 해변으로 이어진다.
바이킹카페를 지나면 어느 앵글에서나 베스트라혼산을 볼 수 있는데 반영을 보려면 스톡스네스해변까지 가야한다.
바이킹카페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세트장으로 만든 바이킹빌리지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