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티포스, 폭풍의 심연

by 성세윤

에길스타디르에 있는 숙소로 돌아오니 밤 9시였다. 밤새 눈 예보가 있었고, 오로라는 일찌감치 포기한 터라 아침까지는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 6시. 밖으로 나가보니 세상은 완전히 눈으로 덮여 있었다. 차는 눈에 갇혀 희미한 윤곽만 드러낼 뿐이었다. 걱정이 밀려왔다. 데티포스는 동쪽과 서쪽, 두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는데 겨울철에는 비포장인 동쪽 도로는 통제되고, 서쪽 루트만 열린다. 하지만 이 정도 눈이라면 서쪽 도로 상태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링로드는 다행히 괜찮았다. 도로 가장자리엔 여전히 눈이 쌓여 있었지만 어느 정도 제설은 되어 있었다. 다른 차량도 없어 도로 한가운데로 쭉 달렸다. 문제는 862번 국도에 진입하면서부터였다.

하늘도, 도로도, 멀리 보이는 산등성마저도 한 덩어리의 무채색 안에 잠겨 있었다. 다행히 도로 가장자리의 비탈에 드리운 희미한 그림자를 따라 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은 쌓여 있었지만 사륜구동 SUV로 길을 뚫어 나가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그래도 바퀴가 눈에 빠지거나 미끄러질 위험은 늘 도사리고 있었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하얗게만 보이는 세상에 두 줄기 바큇자국을 그으며, 30분 거리의 길을 한 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주차장엔 차 한 대 없었다. 아침 내내 데티포스는 내 독차지가 될거란 기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하늘은 구름에 덮여 있었지만, 일출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하늘이 열리길 기대해봤다.




주차장에 첫 바큇자국을 내며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잔뜩 긴장을 하며 운전을 한 탓에 온 몸이 뻐근했고 스트레칭을 먼저 하려 운전석 문 손잡이를 당겼다.

그 순간, 휭 하는 거센 바람소리가 들렸다. 어마어마한 힘이 나를 뒤로 잡아끌었다. 반사적으로 손에 힘을 주며 몸을 물렸고, 문은 사시나무처럼 떨며 내 팔을 잡아 당겼다. 바람은 아프리카 초원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짐승 떼처럼 달려왔다. 왼손까지 뻗어 두 손으로 문을 잡아당기고서야 간신히 문을 닫을 수 있었다.

풍속은 초속 25미터. 피아드라글라우프 협곡에서 삼각대조차 펴지 못하게 만들었던 초속 15미터의 바람보다 훨씬 강했다. ‘폭포 근처는 좀 낫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지도?’ 희망회로를 돌리며 다시 차문을 열었다. 아귀힘을 단단히 주니 문짝이 휘어지는 건 막을 수 있었다. 가방끈은 몸에 바짝 조이고, 몸을 아르마딜로처럼 웅크린 채 폭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른 아침, 온통 하얀 풍경 속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로 첫 발을 내딛는 건 마치 마법 같았다. 푹신한 눈밭을 걷는 느낌은 상쾌했고, 고요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폭포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은 물보라를 실어 날렸고, 그 물방울은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몸은 점점 수그러들었고 허리는 펼 수조차 없었다.

나는 점점 걷는 게 아니라 밀려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10분쯤 지나자, 귓가를 묵직하게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럽에서 가장 강하다는 물살, 데티포스가 드디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너비 100미터, 높이 45미터의 데티포스는 그야말로 쏟아지는 물줄기였다. 우레 같은 소리와 함께 세찬 낙수의 무게감이 온몸으로 밀려왔다.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계절과 세월, 이 지구라는 행성이 품은 중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울림이었다.

이 압도적인 풍경을 어떻게든 담아내고 싶었다. 한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등을 돌려 바람을 막으며 겨우 카메라를 꺼냈다. 삼각대는 펼 생각도 못 했고, 난간을 붙든 채 간신히 한 컷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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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전신이 흔들릴 만큼 강한 바람, 안면을 강타하는 물안개, 북소리처럼 울리는 폭포의 진동... 하지만 카메라에 담긴 건 평평하고 평범한 물줄기뿐이었다.

해는 구름에 가려 있었고, 대기는 잿빛으로 무거웠다. 전망대 난간 아래로 내려가면 좀 더 힘을 담은 구도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바람이 너무 세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몇 장을 더 찍었지만 별 차이 없었다. 카메라를 주섬주섬 다시 가방에 넣는데, 알 수 없는 패배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불끈, 오기가 솟았다.


두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벌떡 일어섰다. 휘청거리던 발끝에서부터 강한 울림이 올라왔다. 울림은 폐를 가득 채우고 심장을 통해 전신으로 퍼져갔다.

그리고 난,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에 대한 욕도 있었고, 데티포스를 향한 감탄사와 바람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대부분은 아무 의미 없는 외침과 원시적인 포효였다.

삶이 삼켜버린 수많은 순간들. 소리도 되지 못하고 글자도 되지 못한 채 뇌리에만 떠돌던 생각들. 가슴 한 켠에 뭉쳐 있던 감정의 잔해들. 그 모든 것들을 소리로 쏟아냈다. 내 외침은 폭포 소리와 뒤섞여 계곡 아래로 가라앉았다.

물보라 때문인지, 눈물처럼 맺힌 물방울이 눈가에 맴돌았고 입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모든 순간 동안, 데티포스는 묵묵히, 거대한 물줄기를 변함없이 쏟아냈다.

극적인 순간을 잡겠다고 이 먼 아이슬란드까지 왔고, 며칠 동안 새벽잠을 줄이며 해와 별을 쫓아다녔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달려왔을까? 데티포스는 그런 나에게, 어떤 답을 던지는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답은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절대 포착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로서 내 영혼을 울렸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다가 또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다.

‘난 지난 몇십 년간 무엇을 위해 살아왔을까?’


아무도 없는 데티포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스스로 답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질문들과 무의미한 동어 반복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바람은 여전히 거세게 불었고, 하늘엔 구름이 깔려 있었다. 시나브, 인생의 칠부 능선을 넘어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서쪽으로 길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고다포스. 한 시간 반쯤 걸리는 거리였다. 원래는 중간에 있는 미바튼 호수 근처를 돌아보고 일몰에 맞춰 고다포스로 향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데티포스를 지나온 뒤, 몸과 마음 모두 기력이 다 빠져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단순한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 어쩌면 하루를 채우기에 필요한 여백이 사라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미바튼 호수를 지나면서도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았고, 흐베리르 지열지대, 딤무보르기르 용암지대, 그리오타이아우 동굴 모두 그냥 지나쳤다. 링로드를 따라 달리며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만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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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호수, 멋들어지게 솟은 흐베르프잘 분화구.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감춰진 수많은 풍경들. 이상하게도, 그날 하루는 그런 모든 풍경을 굳이 보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마치 상상만으로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가벼운 체념 속에 남겨진 하루의 여백 같은 시간이었다.




이동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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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티포스: Dettifoss West Parking

미바튼: Lake Mývatn View Point


데티포스 뷰포인트 (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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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주차장에 주차하고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갈림길이 나온다. 북쪽으로 가면 서쪽 데티포스 전망대로 갈 수 있고 남쪽으로 가면 셀포스로 갈 수 있다.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주차장에서 데티포스 전망대까지는 800m 정도 되고, 전망대에서 셀포스까지가 1km 정도로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거리다.


참고로 동쪽 전망대로 가려면 1시간 15분 정도 운전을 해서 폭포 반대쪽으로 가야하는데 겨울에는 길이 막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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