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포스, 신의 물결

by 성세윤

다음 행선지는 고다포스였다. 링로드를 따라 아이슬란드 섬을 반 바퀴 이상 돌았고, 여행은 어느새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벌써 그 막바지를 넘어섰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마을이 나타나면 나도 모르게 규정 속도에 맞춰 브레이크를 밟았고, 차 한 대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외나무다리도 더는 어색하지 않았다.

미바튼을 지나 고다포스로 향하는 길. 청량한 설산과 투명한 반영이 어우러진 풍경이 길가에 펼쳐졌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날씨였다. 불과 한 시간 전, 데티포스에서 강풍과 물보라를 맞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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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는 마치, 자신에게 아직 보여줄 게 남았다고 말하는 듯했다.




고다포스에 가까워질수록 구름은 걷히고 햇살은 더욱 강렬해졌다.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신들의 폭포’라는 그 이름처럼,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고다포스는 여행을 준비하며 키르큐펠, 요쿨살론과 함께 꼭 가보고 싶은 장소로 꼽았던 곳이었다. 아이슬란드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폭포가 있지만, 나에겐 고다포스의 낮고 넓고 부드러운 물줄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광각렌즈에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폭포. 그래서 일몰, 밤, 그리고 다음 날 일출까지 24시간 가까이 머물며 그 풍경을 담아볼 참이었다.


고다포스는 양쪽에서 접근할 수 있었다. 데티포스나 스투드라길처럼 차로 한참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니었다. 단 10분이면 반대편 전망대로 걸어갈 수 있었다. 나는 먼저 구글 네비가 안내하는 동쪽 전망대로 향했다.


주차장에서 5분쯤 걸었을까. 점점 커지는 물소리와 함께 햇살이 뚜렷해졌다. 북부 아이슬란드의 겨울 햇살이 이토록 선명하고 또렷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약간 경사진 산책로 끝에 다다르자 드디어 고다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대하지 않았던 무지개와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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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선 빛이 폭포수처럼 떨어졌고, 고다포스의 물줄기는 그 빛을 마주보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신들의 물줄기는 말굽처럼 휘어진 암석을 따라 막힘없이 곡선을 그리며 웅장하게 흘러내렸다. 햇살과 어우러지며 수직으로 떨어졌고, 하얀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 물보라는 연한 청록, 희미한 은색, 금빛까지 뒤섞인 사파이어빛으로 변해갔다. 빛과 물은 서로를 감싸며 끊기지 않는 문장처럼, 희뿌연 꿈을 완성하듯 흘러갔다. 그리고 그 교차점엔, 무지개가 떠 있었다. 마치 꿈의 시작을 암시하듯.

여행이 끝나간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진짜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된 건지도 몰랐다.




짐을 풀고 숙소에 들렀다가 다시 고다포스를 찾았다. 이제 막 골든타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자연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강렬한 색감을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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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타오르는 극적인 일몰을 기대하며 폭포로 향했지만 해가 지는 방향으로 다가오는 먹구름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구름은 마치 해를 겨냥한 듯 정확히 움직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5분 거리의 주차장을 향해 차를 몰았고, 전망대에 도착하자마자 허겁지겁 고개를 들었을 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구름이 어느새 해를 삼켜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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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과 폭포는 생기를 잃었고, 진한 먹구름의 가장자리로만 금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태양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았다.


혹시나 싶어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겨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을 담으려면 폭포가 흐릿해졌고, 폭포를 담으면 빛은 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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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잠깐 눈을 붙였다 일어났다. 예보상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잠깐 구름이 걷힐 예정이었다. 이제 믿지도 않는 예보였지만 기댈 건 그래도 예보 밖에 없었다. 휴대폰 알람을 끄고 몸을 뒤척였지만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조금만 더 누워있을까? 정신을 멀쩡하니 금방 일어날 수 있겠지? 이러다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드는 게 수순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수순을 거스르지 않는 게 내가 진정 원하는 건지도 몰랐다.

사고의 흐름이 가뭇해지려는데 나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였다. 그대로 침대에서 일어나 커텐을 젖혔다. 하늘엔 녹색빛이 발광하고 있었다.

순간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쫓기듯 혹은 무언가를 쫓듯, 다리를 바지에 집어 넣고 접형을 하듯 후리스 목과 팔 구멍에 나를 집어 넣었다. 급한 마음 때문인지 박자가 어긋난 듯 모든 동작이 조금씩 뒤틀렸다.

차를 휘달려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폭포 전망대를 향해 뛰었다. 프랑스에서 온 한 그룹과 중국에서 온 다른 그룹이 이미 여기저기 삼각대를 세워놓고 있었다. 나 역시 그 옆에 자리를 잡고 녹색 풍경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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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하늘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폭포를 감싸고,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폭포는 물이 아닌 빛이 되어 흐르고, 휘감고, 굽이치며 나아갔다. 녹색빛은 꿈과 현실을 엮으며 프레임 바깥까지 퍼져나갔다. 음악을 연주하듯, 교향곡처럼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앞에서, 온몸으로 녹색 물결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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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다시 고다포스를 찾았다. 해는 반대편에서 뜨고, 전날 본 구름 예보 때문인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실제로 하늘엔 구름이 가득했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쌀쌀한 공기와 시원한 폭포 소리를 들으며 전망대를 천천히 거닐었다.


아쉬움은 가시지 않았지만, 오로라의 밤을 담아낸 걸 위안 삼아 이제 고다포스를 놓아주기로 했다.

그렇게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던 중, 문득 시야가 환해졌다. 해가 완전히 뜬 건 아니었지만 구름 너머로 황금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반대편 고다포스를 바라보니 산자락을 따라 구름이 내려앉았고, 솜사탕 같은 구름 한 덩이만이 푸른 하늘에 걸려 있었다.


나는 멈춰 섰고, 몸을 뒤로 틀었다가 다시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폭포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전망대에 도착하자마자 눈을 의심했다. 몇 분 사이 풍경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구름은 하늘에 걸린 반사판이 되어 폭포에 은은한 금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차가운 회색빛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따뜻한 빛으로 물든 풍경. 물줄기는 녹빛 수정처럼 반짝였고, 폭포는 생명체처럼 빛을 머금고 숨 쉬었다.

불과 십 분 사이, 태양과 구름과 폭포가 하나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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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오로라, 황금빛 풍경. 꼬박 하루동안 고다포스는 실로 많은 모습을 보여줬다. 말 그대로 화려한 신들의 축제를 목격한 것 같았다. 밝게 달아오르던 황금빛이 약해지고 폭포가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즈음 신들의 시간이 끝나고 다시 현실의 시간이 시작됐다. 하지만 빛을 머금은 물줄기 하나하나가 내 마음 속에 신전의 기둥처럼 솟아 올랐다.

신전에 상주하는 건 어떤 역설의 신이었다. 그 신은 압도적인 풍광으로 내가 고민하던 수많은 것들을 무상케 만들어 버렸다. 수 만년의 세월이 빚어낸 폭포수 앞에 보고서 맞춤법이나 주가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게 신은 부질없는 고민을 사라지게 하는 동시에 그 밑에 숨겨진 내 본질을 볼 수 있게 해줬다.

흐르고 떨어질 뿐인 고다포스처럼, 애쓰지 않고 증명하지 않아도 그저 존재하는 것 뿐일 내 본질. 어쩌면 내 본질이란 폭포수처럼 그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여정에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을 밝히고 미지의 땅을 개척하려는 호기심이나, 무의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더라도 삶의 의미를 깨닫고자 하는 책임감 같은 것 말이다.

의미를 놓아버리니 의미가 되찾아졌다. 힘들어도 괜찮고, 멈춰서도 괜찮으니, 쉬고 싶으면 쉬면 됐다. 그래도 계속 가면 끝없이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그러니 기력을 되찾으면 다시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건 그 자체로 의미있는 일이었다.

다시금 쏟아지는 물길 따라, 폭포 위로 불어오는 바람따라 고다포스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동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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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포스 (동쪽): Goðafoss East Bank Parking

고다포스 (서쪽): Goðafoss West Bank Parking


뷰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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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주차장에서 서쪽 주차장까지는 750m로 차로가면 5분 거리다. 산책로가 이어져 있어 동쪽 전망대에서 서쪽 전망대까지 걸어가도 15분 정도면 충분히 간다.

동쪽 전망대 바로 전에 오른편으로 보면 계곡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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