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빛은 단조로웠지만, 장노출로 담아보니 약간은 신비로운 분위기가 났다. ‘대미를 장식할’ 극적인 풍경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히 가라앉은, 차분한 마지막 장면 같았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달리, 해변까지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니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링로드 일주의 마지막 여정은 흐빗서커였다. 해변가에 있는 코뿔소 형상의 현무암 바위. 북서쪽 끝자락에 있어 자연스럽게 마지막 행선지로 정해졌다. 기대는 크지 않았다. 하루 종일 흐린 날씨라 일출이나 일몰 시간에 맞춰 갈 필요도 없었다. 링로드를 따라 가다 잠시 들르는 정도의 여정. 여행의 끝과 잘 어울리는 잔잔한 마무리였다.
링로드 북부는 확실히 남부보다는 한적했다. 차는 한 대도 없었고 나 혼자 도로를 독차지하며 중앙선을 따라 맘 편히 달렸다. 점점 도로는 완만한 오르막을 타며 산맥 안으로 스며들었고, 하늘은 흐려지더니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처음 겪는 화이트아웃이었다. 단단하고 확실했던 세계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본능적으로 속도를 줄이고 차를 멈췄다. 뒤에서 차가 오면 어쩌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브레이크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계 제로.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위인지 아래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차창 밖으론 그 어떤 경계도, 방향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하얀 흐름뿐. 분명 브레이크를 밟고 있었지만, 하얀 세상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잠시 뒤, 눈보라가 다소 약해지며 도로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조심스레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강풍이 눈을 계곡 아래로 쓸어내고 있어서인지 도로는 예상보다 미끄럽지 않았다. 희뿌연 안개 너머로 도로 표지판과 산등성이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지워졌던 세상이 돌아오고 있었다.
흐빗서커에 가려면 링로드에서 711번 도로로 빠져 30분 정도 북부로 올라가야 했다. 711번 도로는 F도로로 분류되는 비포장 도로였다. 하지만 비포장 도로는 이미 몇 번 경험했고 방금 화이트아웃까지 겪은 터라 큰 거리낌 없이 도로에 진입했다.
마음속에 이상한 조바심이 스쳤다. 9일간 정말 많은 걸 봤고 느꼈는데, 이제 정말 끝이라는 생각. 이유 모를 조급함에 마지막 스퍼트를 하듯 가속페달을 밟았다.
자갈과 진흙, 트랙터의 굵은 바큇자국 위로 차체가 요동쳤다. 웅덩이를 피하려 핸들을 꺾을 때면, 차는 금속 동물처럼 몸을 비틀었고, 둔턱을 지날 때마다 서스펜션은 거친 신음을 토해냈다. 그렇게 한참 흔들리다 절벽 위 전망대에 도착하니, 아래로 흐빗서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해변까지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니 전망대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한낮의 빛은 단조로웠지만, 장노출로 담아보니 약간은 신비로운 분위기가 났다. ‘대미를 장식할’ 극적인 풍경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히 가라앉은, 차분한 마지막 장면 같았다.
주차장을 빠져나온 지 10분쯤 지났을 때, 계기판에 주황색 경고등이 들어온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뭐지? 마음속으로 ‘제발’을 수십 번 외치며 차를 갓길에 세웠다. 이런. 타이어 한 짝이 형편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순간 멍해졌다. 정확히 10일 전 허츠 렌트카 카운터에서 로드사이드 어시스턴스 포함 여부를 묻는 직원에게, 스팸 전화를 거절하듯 무심하게 “노”라고 했었다. 겨울철 아이슬란드에서는 로드사이드 어시스턴스가 필수라는 후기를 수도 없이 읽었건만.
과속으로 달리던 길에 타이어가 손상되었고, 흐빗서커를 보고 오는 동안 바람이 모두 빠진 모양이었다. 주변엔 차 한 대 없었고, 도로는 끝도 없이 펼쳐진 눈밭뿐이었다.
망연자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모르겠어서 일단 차에 들어갔다. 렌트카 계약서를 뒤적거리니 로드사이드 어시스턴트를 부를 수 있는 비상연락처가 있었다. 보험 없이 부르면 백 만원 가까운 비용이 청구된다고 읽었던 것 같은데 달리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전화가 먹통이었다. 젠장!
절망의 밑바닥을 쳤다. 동시에 자기기만에 능숙한 정치인처럼 희망회로가 돌아갔다. '그래도 마지막 날 사고가 난 게 얼마나 다행이잖아.' '눈보라가 휘날리던 그 산맥에서 사고가 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
긍정의 생각들이 쌓이며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우선 트렁크를 열었다. 다행히 스페어 타이어와 공구가 있었다. 옵션은 두 가지였다. 펑크난 타이어로 일단 전화 통화가 되는 곳까지 이동한 후 로드사이드 서비스를 부르는 옵션과 혼자서 스페어 타이어를 끼워보는 옵션.
이미 바람빠진 타이어로 10분 정도 달린 후라 더 이동하면 타이어도 파손될 수 있었다. 그럼 로드사이드 서비스에 타이어까지 백 만원이 넘는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하지만 혼자서 타이어를 제대로 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헐거워진 볼트가 빠져 타이어가 날아가고, 맨 바퀴로 차체가 끌리는 처참한 장면이 상상됐다.
풋. 순간 웃음이 나와버렸다. 그리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이것도 다 추억이고 이야기겠지."
바람에 패딩 자락이 펄럭이고 손끝은 얼얼하게 차가웠다. 낑낑대며 잭을 세우고 중력에 온몸을 실어 렌치를 돌렸다. 펑크난 타이어를 빼고 스페어 타이어를 끼울 즈음엔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그래도, 스페어 타이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눈도 비도 오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밤이 아니라서 더 다행이었다. 손은 기름과 흙투성이가 됐고 옷은 엉망이었지만, 이 순간조차 여행의 일부라는 사실이 싫지 않았다.
공항 근처 숙소까지 남은 거리, 250km. 스페어 타이어로는 다소 위험한 거리였지만, 일요일 저녁의 아이슬란드 벌판에 문을 연 공업사가 있을리 없었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고 핸들을 잡았다. 변속기를 D에 놓고 천천히 가속페달을 밟았다. 덜컹. 자갈을 뭉개며 차는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링로드에 진입하기 전, 다시 한 번 차에서 내려 바퀴 상태를 확인했다. 풀리거나 흔들리는 느낌은 없었다.
정말 기억에 남을 만한 마무리였다. 그 생각을 끝으로 타이어는 기억에서 잊혀졌다. 남은 건 도로와 나,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아이슬란드의 눈덮인 산맥뿐이었다. 죽 뻗은 길을 따라 아이슬란드 여행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다.
뻗어 있는 길 위에서, 이 여행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이동경로
흐빗서커: Hvítserkur parking lot
뷰포인트
주차장에서 전망대까지는 300m 정도 된다. 전망대 옆에 보면 해변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