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 한 잔과 시카 한 모금
쿠바는 마치 오래된 사진첩 같았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색이 다르고, 이야기가 다르다.
뜨겁게 빛나는 노란 벽, 바람에 흔들리는 구름, 오래된 청록색 문틀—
어떤 장면은 환하게 웃고, 어떤 장면은 어둡고 무겁지만 그 이야기 속에 추억이 섞여 있었다.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살사 선율,
바다를 따라 퍼지는 파도 소리,
말레콘 해안도로 위로 부서지는 햇살과 그림자까지 그 모든 것이 색과 빛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마주한 빛과 그림자, 바람처럼 흩날리던 색들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살아 있다.
하지만 그날 현실 속 색감은
사진에 담긴 색감과는 너무도 달랐다.
마치 스페인 속담처럼, ‘La grama del vecino siempre es más verde’—
이웃집 잔디가 항상 더 푸르게 보이듯, 신기하게도 사진 속 색감이 훨씬 생생해 보였다.
1950년대 하바나는 마치 『대부2(The Godfather 2)』 속 한 장면 같았다.
마피아와 향락, 사치와 범죄가 뒤엉킨, ‘카리브해의 라스베이거스’.
그러나 화려함 뒤에는 불평등과 부패, 깊은 가난이 숨 쉬고 있었다.
그 분노는 1959년 쿠바 혁명을 낳았고,
체 게바라는 세계적 혁명의 아이콘이 되었다.
1959년 혁명은 쿠바의 팔레트를 바꿨다.
사탕수수 농장, 럼과 담배 공장, 은행과 산업 시설까지 모두 몰수했으며
쿠바는 외부 자본의 색을 지우고, 다시 자기 색을 찾아 나섰다.
혁명광장은 쿠바 역사의 중심이자,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이다.
광장 한복판에는 호세 마르티 기념탑이 우뚝 서 있고, 주변 건물에는 혁명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특히 한 건물 벽에 새겨진 체 게바라의 거대한 철제 초상과
“언제나 승리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라는 구호는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 초상 앞에 서면, 세계적 혁명의 아이콘은 여전히 그 뜨거운 역사의 흔적이 살아 숨 쉬는 듯하다.
쿠바의 화려한 색채 건물들 사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 회색빛이 있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북한 대사관.
하바나 한복판에 자리한 그 회색 콘크리트 건물 위로는 붉은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남미에서 드물게 사회주의 깃발을 걸려있는 이곳,
한국과는 끝내 닿지 못한 낯선 나라와 쿠바의 관계를 상징하듯 서 있었다.
굳게 닫힌 콘크리트 건물 위로 붉은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붉은 깃발과 차가운 콘크리트, 상반되면서도 묘하게 도시 풍경의 일부가 된 낯선 조합.
나는 그 광경에서, 자유와 구속, 익숙함과 낯섦이 교차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 그곳의 시선과 지침,
그리고 한 인간이 그 안에서 느끼는 무게를 나는 그 말없는 한국어 속에서 감지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바나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어느 한편에는 차가운 벽과 철문이 또렷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마주했다.
그러다 어디선가 들리는 들려온 한국어 한마디.
그 자리에 발걸음이 멈춰 섰다.
그 말은 같은 한국어라고 하기 어려웠다. 익숙한 단어들 대신, 낯선 단어와 어투가 섞여 있었다.
그들은 북한사람들이었다.
북한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도, 지금도 그들은 눈을 내리깔고 주위를 얼른 살핀 뒤, 빠르게 그 자리를 떠났다.
심지어 그 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지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조심스러움은 단순한 낯섦을 넘어, 자유와 감시,
생존과 불안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느끼게 했다.
쿠바의 다채로운 색감 속에 숨은 회색 그림자,
그 속에서 들려온 낯선 한국어가 아직도 마음 한켠을 스친다.
쿠바를 사랑한 대표 예술가, 바로 헤밍웨이.
그는 쿠바를 두 번째 가족, 입양된 고향이라고 불렀다.
1954년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그는 말했다.
“내가 받은 노벨 문학상은 사랑하는 쿠바와 쿠바 국민의 것.”
얼마나 깊이 사랑하면 그런 말이 나올까?
그러면서 문득, 타이밍에 대한 생각했다.
지금이었다면, 미국 사람으로 쿠바에 갈 수 없었을 테니까.
결국 인생은 타이밍이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한다. 나중에 후회가 없도록.
그는 생애를 마무리할 때까지 '핀카 비히아'라는 저택에서 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그가 사용하던 타자기와 안경, 원고가 그대로 남아 있다.
글을 쓰다 잘안풀려서 멈추면 바다로 나가 낚시를 하고, 때로는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삶을 느리게 즐겼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사냥꾼이었다. 집 안 곳곳에 걸린 사슴과 물소의 머리는, 그가 사냥에서 거둔 영광의 흔적이었다.
노벨상과 퓰리처상을 안겨준 『노인과 바다』는 이곳 쿠바에서 쓰였다. 그에게 쿠바는 ‘자유롭게 삶을 즐기는 사람들의 땅’이었다. 바다와 자연, 그리고 강인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는 문학 속에 생생히 담아냈다.
그는 없지만 그의 이야기는 아직도 살아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다.
언젠가는 나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는 하바나 시내 라 플로리디타(La Floridita)는 ‘다이키리의 성지’로 향했다. 그곳은 헤밍웨이가 “내 두 번째 집”이라 부를 만큼 단골로 드나들던 곳이다. 지금도 그곳에 그는 동상으로 손님처럼 앉아 있다. 나 역시 그와 마주 앉아 술 한 잔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 자리는 사진을 찍는 자리일뿐.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내 차례가 찾아왔다.
그는 나를 보며 이야기 하는 듯 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고.
아직도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가 사랑했던 다이키리, 그리고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의 모히토를 즐기기 위해 방문한다. 글과 삶, 술과 바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함께 느끼기 위해서.
쿠바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이름, 시가.
쿠바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가 생산지다.
특히 비날레스(Viñales)의 석회암 토양과 온화한 기후는 세계적 품질의 담배 잎을 길낸다.
이곳에서 수확된 잎은 ‘쿠히바(Cohiba)’, ‘몬테크리스토(Montecristo)’, ‘파르타가스(Partagas)’
같은 명품 시가로 다시 태어난다.
체 게바라가 즐겼던 ‘로메오 이 훌리에타(Romeo y Julieta)’는
부드럽고 우디하며, 은은한 너티 향까지 품는다.
입문자도, 애호가도 꾸준히 사랑하는 이유다.
하지만 시가는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다.
비날레스 시가 공장에서는 말레로가 손끝으로 잎을 고르고, 정성스레 시가를 말아 건네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
바닐라·코코아·커피 향이 은은히 섞인 시가를 천천히 피우는 동안, 대화와 음악, 삶의 여유가 함께 스며든다. 해변에서 럼 한 잔과 함께 시가를 즐기면,
그 순간 여행자는 쿠바인의 삶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콜록이는 첫 모금과 달리 시간이 가면서 조금 익숙해졌다. 시가는 천천히 음미하는 삶의 방식—
‘인생을 느리게 즐기는 법’ 그 자체였다.
쿠바의 또 다른 자부심은 럼이다.
비옥한 토양에서 자란 사탕수수는 열대의 햇살 덕분에 당도가 높아,
압착과 발효, 증류 과정을 거치며 ‘아구아히엔테(aguardiente)’라는 원액으로 태어난다.
이 원액을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면, 시간이 흐르며 바닐라와 캐러멜,
향신료가 어우러진 깊은 풍미가 완성된다.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럼은 다양한 칵테일로 다시 태어난다.
오렌지와 파인애플 주스에 향신료를 더한 럼 펀치(Rum Punch)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술이고,
모히토와 다이키리가 단순한 매력을 지녔다면, 럼 칵테일은 보다 다채롭고 풍부한 맛을 전한다.
하바나 클럽 뮤지엄에 가면 이 과정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신선한 사탕수수 줄기를 갈아 바로 맛보는 주스 한 잔은, 그 자체로 쿠바의 햇살을 삼킨 듯 달콤하다.
쿠바 럼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두 가지 이름이 있다.
하나는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하바나 클럽’,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장인의 혼이 깃든 ‘에드문도 단테’다.
하바나 클럽은 3년 숙성 화이트 럼부터 7년 숙성 다크 럼, 15년 숙성 리미티드 에디션까지,
다양한 맛과 향으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쿠바 사람들이 진정한 자부심으로 꼽는 건 단연 ‘단테’다.
그 안에는 그들의 시간과 정신이 담겨 있다.
‘에드문도 단테(Edmundo Dante)’는 명품 럼이다.
15년, 25년 이상 숙성된 원액을 정성껏 블렌딩해 만든다. 그래서일까, 전 세계의 럼 감별사와 애주가들은 그 깊고 복합적인 향미와 부드러움에 찬사를 보낸다고 한다. 오크통에서 숙성되는 동안 캐러멜과 바닐라, 스파이스 향이 은은하게 스며들며, 입안을 포근히 감싸다가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하바나 클럽과는 달리 대량 생산보다는 한정된 수량으로, 혹은 정교한 기술로 엄선해 빚어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 잔을 마실 때마다 희소성과 특별함이 함께 전해진다. 현지인들은 말한다.
에드문도 단테를 마신다는 것은,
쿠바의 역사와 예술을 함께 마시는 일이다.
제대로 즐기는 법은
럼 한 모금, 시가 한 모금을 함께 느끼는 것.
내 손에는 진한 럼 한 잔, 입술 끝에는 쿠바 시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가 한 모금 입에 물고, 또 한 모금 럼을 마시면
처음에는 쌉싸래하고 낯선 맛이 입 안을 감돌다가
서서히 달콤함과 깊은 향이 퍼진다.
그 열정은 음식에서도 이어진다.
하바나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 ‘라 과리다(La Guarida)’는 쿠바 전통 요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곳이다.
오래된 저택을 개조한 공간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풍긴다. 계단을 오르는 순간부터, 마치 영화 속 장면에 들어온 듯한 낯설고도 매혹적인 기운이 감돈다.
이곳은 오바마 대통령이 식사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당시의 사진이 벽에는 걸려 있었고, 우리는 운이 좋게도 그가 앉았던 테이블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잠시나마 역사의 한 장면 속을 거닐고 있는 듯했다.
꼭 먹어야 할 요리는 로파 비에하(Ropa Vieja)다. 이름 그대로 ‘낡은 옷’이라는 뜻인데, 찢은 소고기에 토마토 소스와 향신료가 스며든 풍미는 입 안에서 깊고 부드럽게 녹아든다.
세비체(Ceviche)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라임 주스의 상큼함과 신선한 해산물이 만나 한 입만으로도 입안이 환해진다.
카리브 해산물 그릴 요리와 쿠반 스타일 바비큐는,
쿠바의 햇살과 바다가 담긴 듯한 담백함과 풍성함으로 여행자의 하루를 완벽하게 채워준다.
그들의 식사는 늘 달콤하게 마무리된다.
부드럽고 진한 플랑(Flan)과 아이스크림은 그 자리를 채웠고, 럼과 시가로 끝까지 쿠바의 향취를 남겼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달콤함과 향이 전하는 여유.
라 과리다에서 쿠바의 문화와 낭만, 그리고 맛의 열정을 함께 경험할 수 있었다.
길거리 곳곳에서 살사와 룸바, 손드럼 선율이 어우러지며,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음악은 시간을 느리게 늘려놓는다.
사람들 사이에 여유와 웃음이 스며들고, 누구나 그 리듬에 맞춰 발걸음을 맞춘다.
말레콘 해안을 따라 걷다 보면,
바다 바람에 실려 오는 음악이 도시 전체를 포근히 감싸 안는다.
푸른 하늘과 눈부신 햇살 속에서 퍼지는 리듬은
쿠바인의 열정과 삶의 활기를 그대로 전해준다.
쿠바에서의 시간은 단순한 시계의 숫자가 아니다.
혁명과 낭만, 예술과 삶, 시가와 럼, 음악과 인간의 이야기가 한데 얽힌 거대한 서사다.
느리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그 리듬 속에서
진짜 자유와 풍요가 자란다.
그렇게 그들은 즐겁게 사는 법을 찾는다.
이 여행은 세월에 바래고 덧칠되면서도,
더 깊어져,
내 마음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