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치않는 이름
엄마가 돌아오는 꿈을 꿨다.
연락을 끊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엄마가 꿈속에서 나를 찾아왔다. 지금 나와 남편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같이 지냈다.
내 곁에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백일된 쌍둥이 딸들이 있었다. 엄마는 아기들을 돌봐주겠다고 했다. 엄마에게 아기들을 맡기는 것이 불안했지만 믿어보기로 했다.
꿈속에서 엄마는 멀쩡해보였다. 정서적으로 불안해보이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거실에 앉아 소주를 마시지도 않았다.
엄마가 정신을 차렸으니 같이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내게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있으면 밥도 해주고 아이들도 돌봐주고 남편이 출근해 있는 동안 말동무도 해주고. 평범한 다른 집 딸들처럼, 아이를 낳아 친정엄마가 도와주는 친구들처럼 지내고 싶었다.
엄마에게 기대고 싶었다. 엄마 되기가 원래 그렇게 어려운 거라고, 그래도 너라면 잘해낼 수 있다고, 먼저 엄마가 되어본 엄마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직감했다.
엄마는 밤 늦게 고주망태가 되어 들어올 것이다. 동네 술집에서 만난 비슷비슷하게 인생을 망친 사람들과 모여 남을 비난하면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셔댈 것이다. 주머니에 있는 돈은 모두 술값으로 써버릴 것이다.
이제부터 엄마는 내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제발 정신 차리라는 말도, 나가지 말라는 말도 듣지 않을 것이다.
괜찮은 시간은 끝났다. 다시 악몽이 시작되었다.
“엄마가 또 술을 마시러 나갔어.”
남편에게 말했다. 절망적이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도 그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 앞날이 변치 않게 절망적일 거라는 확신. 그 감정은 찝찔하게 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세수를 했다. 세면대 거울 앞에서 생각했다. 엄마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삼십대 후반. 고아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이십대가 끝나고 내게 새로운 가족들이 생겼지만, 상처는 여전하다.
내 글은 이 상처에서부터 만들어진다. 상처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아서 계속 나를 쓰게한다.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가정을 이룬 뒤 서서히 치유되고 있다.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이름들을 거쳤지만(예를들면 학생 선생님 기자 등등), 변치않는 내 진짜 이름은 누군가의 딸, 아내, 며느리, 엄마일 것이다.
어쩌면 모두가 그럴 것이다. 우리의 변치않는 이름은 가족의 테두리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