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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현 Oct 17. 2019

<투쟁영역의 확장> 리뷰

문제적 작가 미셸 우엘벡의 첫 작품

  우파들이 자랑스레 여기는 미덕이 성실함이라면, 좌파들이 자랑스레 여기는 미덕은 예민함이다. 좌파들은 으레 세상에 자기 외엔 예민한 사람이 없는듯이 행동하곤 한다. 그들은 채찍질 당하는 말 앞에서 고꾸라진 니체를, 생의 슬픔을 견딜 수 없어 목숨을 끊은 벤야민을, 잡지 표지에서 제국주의의 신화를 포착하고 분노했던 바르트를 따라하려 한다. 만약 우파인데도 예민함을 갖춘 인물이 있다면? 그리고 그 예민함으로 자신들의 전유물이었던 불편한 시선을 그대로 돌려준다면? 좌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미셸 우엘벡이 있다.

  <투쟁 영역의 확장>의 주인공은 건실한 IT 기업에 근무하는 직원이다. 그러나 우엘벡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늘 그렇듯이 삐딱하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는 페미니스트들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정신분석가들을 증오한다. 그는 2년째 연애를 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성을 만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인물도 아니다. 오히려 못생기고 여자를 밝히는 티스랑을 냉소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클럽에서 티스랑을 거절한 여자를 칼로 찔러 죽이도록 종용한다.

  성적 적대는 우엘벡에게 중요한 주제다. 우파들이 이룬 경제적 자유주의는 사람들을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투쟁하도록 만들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저주를 받은 내용대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땀을 흘린다. 그리고 68혁명 이후 성적 해방을 내세워 좌파들이 이뤄낸 성적 자유주의는 사람들을 성적인 영역에서도 끊임없이 투쟁하도록 만들었다. 경제적 자유주의와 성적 자유주의는 “투쟁 영역”을 사회의 모든 연령층과 각계 각층으로 확장시킨다. 또한 이러한 자유주의 구조는 불평등을 만들어낸다. 아무리 투쟁해도 얼마 얻지 못하는 사람들과, 넘치도록 많이 얻는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

“경제적 차원에서 라파엘 티스랑은 승자이지만, 섹스 차원에서는 패자이다. 어떤 이들은 그 두 가지 다 성공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두 가지 모두 실패한다. 기업들은 학위나 자격증을 가진 젊은이들을 놓고 다툰다. 여자들은 일부 젊은 남자들을 차지하려 한다. 남자들은 일부 젊은 여자들을 차지하려 한다. 그 와중에서 일어나는 동요와 혼란은 심각하다.”(p. 140)
 
  작품의 후반부에서 이 경제적 차원과 성적인 차원은 “비너스와 마르스”라는 테제로 등장한다. 우울증으로 인해 정신분석가와 상담을 받는 주인공은 경제적-남성적 차원과 성적-여성적 차원 외에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고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마르스의 차원과 비너스의 차원 모두에서 사람들을 사회로부터 원자화된 개인으로 분리시킨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얼굴에 총을 맞아 큰 상처와 흉터가 생겼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은 개인이 신경생물학적으로 느끼는 고통을 넘어 사회적 고립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자유주의 사회는 개인과 사회를 단절시킴으로써 개인에게 무한한 고통을 홀로 감내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최악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이유이다.

  정신분석가와 주인공의 논쟁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사형을 앞둔 뫼르소가 고해를 보러 온 신부에게 따져묻는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주인공은 정신분석가에게 자신의 고통을 당신이 실질적으로 나눌 수 있냐고 묻는듯 하지만 정신분석가는 답을 회피한다. 결국 자신의 개인적 고통을 나눌 사람을 찾지 못한 주인공은 건조하고 관조적인 독백을 하며 말을 마친다.

“나는 심연의 한복판에 있다. 나의 피부가 나와 세상의 경계선이다. 외부 세계는 나를 짓누르는 압력이다. 이렇게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은 절대적이다. 이후 나는 나 자신 속에 갇힌다. 자기 희생적인 융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목표가 없어졌다. 오후 2시다.”(p. 223)

  미셸 우엘벡은 결국 이러한 냉소를 던진채로 소설을 끝낸다. 이것은 과연 자유주의가 퍼진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과거의 사람들보다 행복한지 묻는 질문이다. 그는 은연중에 ‘차라리 과거가 나았어’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자다. 하지만 타고난 예민함으로 세상의 모순을 파고들어 좌파와 우파를 모두 경악시키는 문제적 작가이다. 우엘벡의 질문은 이 소설이 발표된 후 4년 뒤에 발표된 <소립자>를 통해 더 구체화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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