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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더 Sep 05. 2023

좀 하는 나 1

   주말에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는데 영화 속 주인공이 두 손을 모아서 커다란 고동 모양으로 만들더니 부ㅡ우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의 어린 딸이 아빠를 따라 하며 소리를 내려고 연신 애를 썼다. 그 순간 번쩍! 나도 할 수 있는데!

"자기야. 저거 나도 할 수 있어. 얘들아, 엄마도 할 수 있어."

   이내 양손을 모아 잡고는 후ㅡ 후ㅡ 바람을 불어넣었다. 쉬ㅡ 쉬ㅡ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났다. 열 번남짓 불고 있을 때 부ㅡ우 드디어 소리를 만들어냈다. 아, 바로 이 소리야!


   내가 소리를 내자 아이들도 곧장 손을 소라 모양이 되게 포개고 입을 갖다 대고 불기 시작했다. 후ㅡ 후ㅡ. 몇 번을 해도 소리가 안 나자 언제부터 소리를 낼 줄 알았냐고 큰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그러게. 내가 이걸 몇 살 때부터 불 수 있었더라?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내가 이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도, 소라 모양 손동작을 해봤다는 것도 새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그럼 내가 이렇게 소리 내는 방법을 언제부터 안 했더라? 이것 역시 전혀 기억에 없다. 한 가지 드는 생각은 잊은지도 모른 채로 잊어버린 내 모습이 있었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물 밀듯 몰려왔다는 거다.


   어릴 적에 살던 동네에는 비좁은 골목이 많았다. 국민학교 1, 2학년이던 내가 양팔을 좌우로 쭉 뻗으면 양쪽 벽이 양 손바닥에 넉넉히 닿을 만큼 좁은 골목이 있었다. 골목은 수시로 대문 놀이 장소가 되었다. 두 명의 술래가 서로 마주 본 채 양손을 맞잡아 하늘 높이 올려서 대문을 만들고, 거길 통과하는 아이들을 노래가 끝나는 순간에 확 잡아채는 대문 놀이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술래가 양 손바닥과 양발로 골목의 벽을 세게 밀어내듯 힘을 주어 버티는 방법으로 벽을 오른다. 마치 스파이더맨이 된 것처럼. 커튼용 압축봉을 생각하면 쏙 이해가 될 장면이다.


   술래가 다른 아이들의 키를 훌쩍 넘는 높이만큼 벽을 오른 뒤 위에서 딱 버티고 있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 같이 노래를 부른다. 동동동대문을 열어라~ 남남남대문을 열어라~ 열두 시가 되면은~ 문을 닫는~~~~~~~을 길게 빼고 부르는 동안 골목을 새끼쥐처럼 재빠르게 왔다 갔다 하던 아이들을 술래가 내려보고 있다가 마지막 가사인 '다~'를 뱉으면서 바닥으로 쾅 뛰어내린다. 아이들이 와~! 고함을 내지르며 골목 양쪽으로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면 술래가 부리나케 쫓아가서 도망가는 아이를 툭 쳐야 그 아이가 아웃이 되는 대문 놀이였다. 술래는 대부분 내가 자원했다. 내가 능수능란하게 벽을 탔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다시 찾은 내 모습이다.


   그리고 나는 내 키를 훨씬 넘는 철봉에 거뜬히 거꾸로 매달려 아무렇지도 않게 두 손을 놓고 박쥐처럼 대롱대롱 매달릴 수 있는 아이였다. 또 구름사다리 위로 올라가서는 꼿꼿이 선 채로 걸어서 순식간에 구름사다리를 건널 수 있는 아이였다. 뿐만 아니라 박스 종이로 접은 딱지가 너무 두꺼워서 후딱 잘도 뒤집힐 것 같으면 1.5톤 트럭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트럭이 지나가는 순간에 절묘하게 트럭 아래로 딱지를 던져서 트럭 바퀴가 정확하게 딱지를 밟도록 만들 수 있는 아이도 나였다. 이 모든  나를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라도 했던 듯 아예 잊고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하나하나 다시 만났다. 어릴 적의 이런 나를 다시 만날 때마다 나는 없던 용기가 발끝과 손끝, 그리고 마음속 저 아래에서 퐁 퐁 솟아남을 느낀다. 아니, 잊어버렸던 용기라고 해야겠다.


   살면서 남들과 비교를 해서든 아니든 온몸에 힘이 쑥 빠지고, 겁이 나고, 숨어있고만 싶고, 잘하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어릴 적의 나들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더라면 그 힘든 순간들을 아무것도 아닌 듯이 감당했을 텐데. 잊고 있었던 '나'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커다란 아쉬움이 물밀듯 밀려오는 이유다.

   '뭐야! 내가 그렇게 겁 없는 애였어! 그런 내가 면접시험을 두고 떠는 거야!'

   '티브이 만화 <안녕, 자두야>의 '자두'가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매력덩어리인 줄 알았는데, 나도 만만치 않았네. 그러니, 육아 이까이 것 발로 해주겠어.'

   '내 두 아들이 해보고 싶어 하는 건 다칠까, 무서워할까 걱정부터 하지 말고 하게 하자. 나도 겁 없이 했으니, 아이들도 할 수 있을 거야.'

   '맞아. 나 고동 소리 낼 수 있었지. 나도 특별하게 할 수 있는 게 있었어.'


   용감한 참 멋진 많은 '나'들을 잊고 살았다. 아직도 잊힌 상태인 '나'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많을 것이다. 그 '나'들을 하나라도 더 찾고 싶다. '나'들을 찾음으로 구석진 자리에서 쪼그리고 있지 않아도 되는 나인 걸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이것저것 원하는 걸 닥치는 대로 다 해보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도록 '나'들아, 깨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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