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땐 고향집에서 지냈다.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네 생맥주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저녁 6시에 출근해서 새벽 2시에 퇴근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배워야 할 게 좀 있었지만 금세 적응하였다. 작은 마을이라서 오는 사람이 또 오는 단골 장사로 운영되는 가게였다. 그래서 심심하기도, 한편으로는 흥미롭기도 했다.
늘 오던 손님이 오니까 새로울 게 없어서 지루하기도 했고, 그런데 손님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던 게 긴 인사로 바뀌면서 나는 손님을 기다리게 되고 손님은 동행 없이 와서는 내 앞에서 한 잔을 하고 가기도 했다. 성탄절과 신정, 구정 같은 대목에는 사장님 부부와 함께 일했지만 그 외에 대부분은 주로 나 홀로 가게를 지켰다. 그런 나에게 사람들은 직장 얘기, 애인 얘기 등을 툭 털어놓는 게 나를 편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시간이 훅 흘러가서 퇴근 시간이 성큼 다가와 있었기에 얘기를 듣는 게 싫지 않았다.
그런데, 구정 대목까지 다 지나가고 다시 여유로워진 어느 날 당시 내 아버지뻘 되는 분이 가게를 찾았다. 못 보던 얼굴이었다. 젊은 남자와 같이 왔는데 부자 사이 같지는 않았다. 메뉴 주문을 받고 준비해서 서빙을 해놓고는 나는 빈 테이블에 앉아서 스산한 겨울 거리를 내다보며 음악에 빠져 있었다. 그때 그날따라 가게를 지키고 있던 사장님이 나를 부르길래 갔더니 사장님은 그 손님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있었는지 그 손님과 동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손님 옆에 앉으라고 했다.
앉기 싫었는데, 싫다는 표현을 잘 못하는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앉았다. 그때부터 이 손님이 벌인 작태를 보시라. 내 이름을 묻길래 겉모습이 점잖아 뵈는 아버지 같은 그분께 알려줬더니 자기 부인 이름이랑 같다며 나한테 부인의 사진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덥석 내 손을 잡고는 조물딱조물딱거리는 거다. 이런 abcdefg 같은 경우가 다 있나! 그런데 23년 전의 그 일을 다시 생각해도 후회가 되는 건 내가 왜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못했는가 하는 거다.
이건 뭐지?라는 생각과 함께 몹시 불쾌한 느낌이 들었지만, 동석하고 있던 남자 사장님도 동행한 젊은 남자도 아무것도 잘못된 게 없다는 듯이, 아니 오히려 이제 뭔가 제대로 되었다는 듯이 흐뭇한 기분으로 앉아들 있고 나는 더러운 구더기가 꿈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한동안 내 손으로 느끼며 거기에 앉아 있었다.
작은 바닷가 마을인 고향의 단골손님들은 가게에 들어서면 음악 얘기부터 했다. 나보다 대여섯 위인 손님들은 조성모의 <가시나무>를 찾았고, 그들보다 열 살 남짓 위인 이들은 이문세의 노래를 찾았다. 그리고 가게 바로 뒤편에 있는 해군 부대의 군인들은 우르르 몰려 들어오면서 빠른 비트의 신나는 음악을 원했다. 취향대로 말이라도 해볼 수 있는 게 시골 생맥주 집의 매력이었고 단골손님들의 특권이었다.
그리고 주문을 하면서, 서빙을 받으면서 내게 장난을 치는 게 단골손님들의 특징이다. 이를테면 가게의 기본 안주가 새우깡이었는데
"아가씨, 깡 있어요?"
새우깡이 있냐는 걸로 알아들은 내가
"네, 깡 있어요."
라고 대답하면 해군 병사들이
"야! 이 아가씨 깡 있대."
라며 자기들끼리 와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식이었다. 그럼 그제야 나도 크게 웃었다. 이런 식의 장난들. 불쾌함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농담들. 신체 접촉은 가당치도 않았다.
동행 없이 혼자 온 단골손님은 아예 데스크에 자리를 잡고는 내가 서빙을 하면 하는 대로, 내가 안주를 조리하면 하는 대로 나를 기다려주면서 마시곤 했다. 기다려주니 나도 서두르지 않고 다른 손님들 주문에 응대한 뒤에 마치 놀러 온 친구를 대하듯 그 손님의 잔이 다 빌 때까지 얘기를 들었다. 이 역시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님도 나를 배려해 주니 편안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아버지뻘 되던 겉모습은 멀쩡한 그 손님은 선을 넘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생을 일부러 부르기까지 해서 동석을 시킨 남자 사장님도 선을 넘었다. 동행한 젊은 남자는 나이 지긋한 손님의 직장 부하였던지 부동의 자세로 곳곳이 앉아있기만 했으니 선 어쩌고저쩌고 하는 데에서는 제외시키는 걸로. 상대가 불쾌감을 표현하든 안 하든 넘지 말고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다. 그 선을 지키면 손님과 아르바이트생의 관계가, 주인과 아르바이트생의 관계가, 선생님과 학부모의 관계가, 친구와 친구의 관계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언짢지 않다. 억울하지 않다. 분노하지 않을 수 있다. 제발 선 넘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