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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더 Jun 26. 2023

점점

   대학을 졸업한 후로 앞의 반년은 학원 강사로 일을 했고, 뒤의 반년은 학원에서 가르쳐 번 돈으로 교원임용고시를 준비했었다. 딱 세 번만 도전하기로 정해놓고 달려들었던 건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시절의 일인데, 그날은 학원으로 출근을 하는 마지막날이었다.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학원이었는데, 수업을 하다가 수업이 끝날 무렵에 오늘은 선생님과 만나는 마지막 날이라고 아이들에게 알렸다. 그러자 2학년인가 3학년이던 그 아이들이 훌쩍이기 시작했다. 소리가 점점 커져서 내가 한 명 한 명을 달래어 울음을 멎게 해야 할 정도였다. 아이들을 진정시킨 나는 선생님으로서 자라나는 꿈나무들에게 해주고 싶고 해줘야 하는 축복과 당부의 말들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퇴근을 할 땐 그 학원 차량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날도 몇몇 아이들과 함께 학원차에 올랐는데, 아까 큰소리로 훌쩍였던 한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선생님, 저, 아까 너무 힘들었어요. 다른 애들은 우는데, 저만 눈물이 안 나와서 슬펐던 일을 생각하느라 힘들었어요. 휴." 아이의 순진무구한 말에 미소로 대답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중학교 때였다. 3학년 선배들의 졸업식에서 후배들을 대표하여 내가 송별사를 읊었었다.


   연습을 하여 거의 외우다시피 한 송별사를 졸업식 당일에 조회대에 올라가서 읊는데, 홀로 연습할 때와는 다르게 마이크를 통과하여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내 음성이 들리자, 울먹임을 넣으면 썩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송별사의 끝을 마무리했다.


   그때가 중학교 2학년 때 겨울 방학과 봄방학 사이였으니까, 1995년 2월이었겠다. 그 당시에 내 또래에 속했던 학생들이 다들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학교를 떠나는 선배들과 남는 후배들은 졸업식을 슬픔의 의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같은 시골 동네에서 나고 자라서 같은 초등학교를 거쳐 같은 중학교를 다녔던 우리들은 중학교를 졸업하더라도 그게 곧 이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송별의 시간이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그저 슬픔에 젖은 목소리가 송별사와 어울릴 것 같아서 울었을 뿐이다.


   20대 때 학원에서 가르쳤던 그 아이나 나나 대상을 향한, 그리고 상황에 대한 찐하고 뜨겁고 울컥하는 무언가를 느껴서 눈물을 흘린 건 아니었다. 울어야 할 것 같아서 운 것뿐이다.


   그런데, 어른이 된 나는 찡하고 따갑게 대인 듯하고 먹먹한 무언가가 느껴져서 우는 때가 많다. 한 해의 뒷 반년을 임용고시를 준비할 때 돈을 아끼느라 아침은 우유 한 팩, 점심은 김밥 한 줄, 저녁은 천백 원의 대학교 구내식당 백반으로 끼니를 해결했었는데, 그래서 넉넉치 못한 형편에 악착같이 공부하는 학생들을 만나면 나는 운다.


   10년 전 큰아이가 두 돌 되기 직전에 남편의 직장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는데, 강원도에서 전라도로,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우리 가족만 외딴 무인도에 갇힌 것같이 터전을 옮겼다. 그러고 나니 아무런 연고도 없이 홀로 발을 동동 구르며 육아를 하는 엄마들의 토로를 들으면 나는 눈물이 난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친구한테 안부 전화를 걸었는데, 그새 홀어머니를 떠나보냈다는 그 친구의 말에 전화기를 놓지 못한 채로 얼마나 소리 내어 울었던지.


   상대의 처지가 내가 겪은 상황과 똑같지 않더라도, 상대가 겪은 일이 내게 닥쳤던 일이 아닐지라도 그 사람의 심정이 십분 이해되고, 그렇게 이해되어 울게 된다.


   내가 점점 한 사람 두 사람이 이해가 되고 헤아려지고 수긍이 가는 게 나는 참 좋다. 그렇지 않았을 때는 그 사람이 도통 왜 그러는지, 어째서 그랬는지, 어쩌다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도대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왜! 왜!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나이를 먹어서 다른 사람이 이해가 되는 걸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런 일 저런 일을 겪다 보니 내가 그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 사람도 그런 건가 보다며 인정해 주게 되는 것 같다. 똑같은 일을 겪지 않았더라도 같은 심정이었던 때를 떠올리며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이기적이라는 지적을 받아본 적이 있는 내게 이해되고 헤아려지고 수긍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난다는 건 나 역시 누군가에게 이해불가의 상대였다가 세월이 지날수록 그들로부터 이해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너도나도 이해되고 이해받는 게 절로 절로 이루어지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내일이, 다음 달이, 요다음 해가 은근히 설레며 기다려진다. 이해받는 걸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이해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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