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더 May 25. 2023

뜨거운 미숫가루

   바짓단과 소맷단이 짧아질 만큼의 더위가 시작되고 살갗이 따갑도록 햇볕이 꽤 내리쬐는 때부터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의 이마와 코끝이 송골송골 맺힌 땀으로 가득해진다. 그러면 아이와 아이의 친구들을 바로 코앞에 있는 작은 가게로 데리고 가서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고르게 하는데, 새하얀 냉동고 앞에 선 아이들은 가게로 걸어올 때부터 신이 나서 흥얼거리던 콧노래를 뚝 삼키고 깨금발을 한 채 냉동고 속을 들여다본다.  머리로 입으로 더운 김을 내뿜는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고르느라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갈 듯한 기세로 냉동고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내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푸근하게 떠오른다.


   한두 살 터울인 언니와 여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자매가 오후의 뜨거운 햇볕이 따가운 줄도 모르고 고스란히 등으로 받으며 엄마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장면이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일고 그때껏 낌새조차 알아채지 못했던 출출함이 훅하고 한꺼번에 밀려올 때였다. 얼굴에서 화끈거리게 피어오르는 열기를 쫓느라 셋은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오로지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여섯 개의 눈동자는 유난히 맑게 반짝였다.

   쯔억쯔억 ㅡ 양은 양재기에 쏟은 미숫가루에 물을 간지 나게 부어가며 미숫가루가 덩이로 뭉치지 않게 쇠숟가락으로 꾹꾹 눌러  개는 소리.

   서억서억서억 ㅡ 잘 개어진 미숫가루물에

여름날 한낮의 백사장 모래처럼 눈 부시게 새하얀 설탕을 듬뿍 퍼넣고 쇠숟가락으로 휙휙 저으면 양재기 바닥에 깔린 설탕과 숟가락이 부비며 내는 소리.

   설탕이 다 녹았을 즈음 와르르 떨군 얼음이 휘휘 젓는 숟가락과 양재기와 여기저기 사방으로 부딪히면서 나는 덜그럭 덜그럭 소리, 다 됐다는 소리였다.

   꽝꽝 얼 정도로 차가워진 양재기를 고 작은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한 입 쭈욱 들이키면, 조금 전까지 동네 아이들과 뛰어노느라 찜솥의 떡처럼 폭폭 달아올랐던 세 자매의 머리부터 발끝이 치ㅡ 소리를 내며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듯 맥없이 식었다. 순간 저절로 튀어나오는 아저씨가 지를 법한 탄성 "캬!" ㅡ 이게 다 됐다는 진짜 소리였겠다.


   끼니때가 지나간 줄도 모르고 밖에서 한껏 놀다가 뭐라도 먹고 싶어서 집으로 달려 들어가면, 그럴 때마다 기다리셨다는 듯 어머니는 얼음 미숫가루를 타 주셨다. 요즘처럼 간편하게 쉐이커에 담아 고작 몇 번 흔들어서 쉬이 마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길 쪽으로 향한 부엌문의 문지방에 걸터앉으신 채로 미리사 꺼내둔 양재기에 미숫가루를, 물을, 설탕을, 얼음을 순서대로 넣고, 넣을 때마다 제법 한참을 저으셨다. 커다랗고 두툼해서 한없이 든든했던 어머니의 손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일일이 세 개의 그릇에 나누어 하나하나 따로 주실 때도 있었고 양재기째로 언니 한 입, 나 한 입, 동생 한 입 번갈아가며 들이키게 할 때도 있었다. 설탕이 다 녹고 양재기 겉에 차가운 물방울이 맺힐 때까지 어머니가 진득하니 저어서 만들어 주신 달짝 시원한 미숫가루 앞에서는 조급증을 떨거나 어머니를 재촉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시듯 미숫가루물을 다 만들면 그때까지 미동도 않고 기다릴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마실 차례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짧은 순간에는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다. 뜨거운 여름 해가 사정을 봐주지 않겠다는 기세로 쳐들어오던 처마 밑바닥에 아예 철퍼덕 퍼질러 앉아서 벌컥벌컥 들이켜다 너무 차가워서 숨도 못 쉬겠을 때에라야 잠시 입을 떼었다.

   여름이면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미숫가루가 나의 가슴 저 깊은 곳에 뜨끈뜨끈하게 자리 잡고 있는 건 미숫가루 옆에 늘상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리라. 때 맞춰 밥을 먹으러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도, 방금까지 노느라고 손톱 밑에 시커먼 때가 잔뜩 꼈어도, 노는 데 정신이 팔려서 숙제를 깜빡했어도 후루룩 들이키는 미숫가루물 너머에서 자식새끼가 목 넘김 하는 걸 바라보던 어머니는 어떤 잔소리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줄 것이 미숫가루뿐인 게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셨다. 그런데 내가 마신 게 미숫가루뿐인 게 아니라 샘같이 솟아 넘치는 어머니의 사랑의 마음인 건 참으로 알 수 없는 신비일 따름이다.

이전 01화 부끄럽거나 별일 아니거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