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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연변호사 Sep 23. 2022

유산(流産)과 수술

참 많이 울었던 그날


서른 살 가을에 동갑인 남편과 결혼했다.


결혼 전, 나름의 인생계획을 세우면서 반년은 신혼을 즐기다가 임신을 하자 했다. 그땐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는 줄 알았으니까.

     

결혼하고 남편과 나는 열심히 놀았다. 서울 곳곳을 돌아다녔고 콘서트도 가고 단거리 마라톤대회에도 나가고 여행도 많이 다녔다. 임신하기 전 마지막 여행이라며 동유럽을 다녀왔던 것 같다.  


    

이제 임신할 시간이다.


한 달, 두 달, 세 달 소식이 없다. 아니지, 소식이 없어야 하는데 정해진 날 꼬박꼬박 생리를 한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서 날짜를 받아왔다. 초음파로 자궁 상태를 보면서 가임기를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주말부부다. 그래도 어떻게든 날짜를 맞추려고 평일에 퇴근 후 서울에 올라갔다가 다음 날 아침 내려오기도 했다(글을 쓰면서 아니, 임신을 하려면 내 몸이 중요한데 왜 내가 올라갔지? 하고 생각해보니 당시 남편은 아침 7시 반에 출근하였고 나는 9시에 출근하였으므로 남편이 서울과 전주를 왔다 갔다 하는 건 불가능했던 것 같다. 아, 그리고 나는 전주에 따로 집이 없고 친정에 살았다. 내가 서울을 올라가는 게 당연했다).


반년 정도 지났을 때 임신을 했다. 임신테스트기의 두 줄을 확인하자마자 온 동네에 소문내고 싶었지만 인터넷을 찾아보니 아기 심장소리까지는 듣고 알려야 된다길래 꾹 참았다. 임신테스트기 두 줄을 확인하는 게 보통 4주 차니까 아기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는 6주까지 2주만 참으면 되는데 그게 참 길었다. 아기 심장소리를 듣고 병원에서 초음파 사진을 받은 뒤 시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하였다. 그전부터 남편과 양가 부모님들께 어떻게 알려드릴까 하고 고민했던 것 같다. 시부모님께 초음파 사진을 보여드리며 임신소식을 알렸다. 아마 축하한다는 말씀을 하셨겠지? 통화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핸드폰 화면에 비추던 어머님, 아버님의 얼굴이 기억난다. 사실 우리 부모님께는 어떻게 알렸는지조차 기억이 안 난다.     


그때가 서른 두 살, 2월이었다.      


당시 우리의 신혼집은 서울역과 공덕역 사이쯤이었고 인근에서 가장 유명한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보았다. 진료 초기부터 ‘자궁 내에 피고임이 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 알고만 있으라고 하였다. 다시 일주일 뒤에 진료를 보았는데 피고임이 계속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였다. 또 일주일 뒤, 가만히 누워있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자주 핸드폰으로 ‘임신 피고임’ 등을 검색하였지만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본 적은 없던 것 같다. 2주 정도는 정말 누워서 생활을 했다. 낮에도 침대에 누웠고 거실에 나와 있을 때에도 소파에 누워 있었다. 12주가 넘으면 안정기라던데. 빨리 12주 차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2주 1일. 이제 안정기가 되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병원에 갔다. 피고임이 가득해서 태아가 살 수 없는 환경이라고 했다. 의사가 진흙 밭에 비유를 했던가. 내가 의사의 말을 들으면서 머릿속에 그린 이미지는 동그란 공간 안에 진흙이 가득 차서 아기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한 채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하루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울면서 병원 밖으로 나왔다. 남편에게 전화하였고 다른 병원에 가서 한 번 더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지금은 없어진 충무로의 제일병원에 갔다.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수술 전날 엄마가 서울로 올라오셨다. 남편 퇴근 전 엄마랑 먼저 병원에 입원하러 갔다. 마지막으로 초음파를 보고 질 안쪽에 주사를 놓은 뒤 어기적어기적 걸어서 엄마랑 병실로 올라갔다. 짐을 두자마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화장실에 가서 온갖 것을 토했다. 토하면서 그 압력 때문에 눈물이 살짝 났던 것 같은데 눈물이 쉴 새 없이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울었다. 내가 못 지켰다. 우리 아기, 너무 미안했다.

     

다음 날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 눈을 떴는데 남편이 보였다. 다시 눈물이 났다. 배를 만져 보았다.


- 이제... 아기가 없어...


남편과 함께 한참을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다시 우리에게 아기가 올 때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고백하자면 다시 내가 임신을 할 때까지, 지인들의 임신 소식에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했다. ‘잘됐다, 축하해!’라고 말하고 다시 남편에게 전화해서 ‘누구도 임신했대...'라고 이야기했다. 남편은 '속상해? 우리도 곧 생길 거잖아. 걱정마.'라며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해 주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남편도 속상했겠지.


지금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건 시간이 걸렸지만 그 후에 두 명의 천사들이 나에게 왔기 때문이다. 첫 번째 천사는 몇 번의 시험관 끝에 어렵게 왔지만 두 번째 천사는 어느 날 선물처럼 찾아왔다.

가끔 천사들이 심하게 떼를 쓰거나 나를 화나게 할 때면 내가 이 아이들을 얼마나 간절하게 원했는지를 생각한다.


그래,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법무법인 여원 대표 변호사 박수연입니다.

법무법인 여원 (yeoo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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