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것에는 순서가 있다. 일반적으론 큰 집합부터 작은 집합 순으로. 노란색과 빨간색을 구분한 뒤에
버건디와 크림슨을 구분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사칙연산을 배우기 전에 미적분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지만 그렇게 배운다면 금세 흥미를 잃어버리게 될 수 있다.
술도 다르지 않다.
술도 배우는 데에 순서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그 당연한 순서를 까먹곤 한다.
한국의 술은 소주와 막걸리가 끝이 아니다
한국의 술을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언제나 소주와 막걸리만 떠올린다. 그러곤 처음처럼은 어떤지 참이슬은 어떤지 비교한다. 술집에서 흔히 보는 광경이다. 막걸리는 어떤가? 알밤막걸리가 맛있는지 아니면 옥수수막걸리가 맛있는지. 사실 일품진로가 A라면 화요는 A'이다. 지평막걸리가 B라면 백련막걸리는 B'라는 것이다. A와 A'의 차이를 탐구하는 것도 물론 좋다.
하지만 작은 것에 집착할수록 우리는 그보다 더 큰 C와 D를 놓치게 된다. 소곡주, 과하주, 홍주 우리에겐 아직 더 큰 집합이 너무나 많다.
와인과 양주는 같은 크기가 아니다.
서양의 술을 뜻하는 양주는 어떨까? 양주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우리는 양주를 두 가지로 나누려는 경향이 있다. 와인과 양주. 웃기지 않는가? 사실 와인은 양주의 하나일 뿐인데 같은 크기의 집합으로 인식된다. 와인이 큰 집합의 크기로 인식되는 순간 그 아래의 집합도 원래 크기보다 중요한 크기로 인식된다. A와 A'를 구분하는 기준이 B와 C를 구분하는 것과 똑같이 인식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와인의 포도 품종을 비교하는 일이 마치 위스키와 브랜디를 비교하는 것과 같이 인식된다는 뜻이다.
문제는 와인이 우리가 가장 접하기 쉽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카베르네 쇼비뇽 와인과 말벡 와인을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두 와인의 맛을 구분하지 못하는 순간 양주 전체를 포기해버리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브랜디와 위스키를 구분하는 것도 똑같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바라는 공간을 내가 모르는 것을 파는 어러운 공간으로 인식하게 된다.
사실 A와 A'의 차이는 B와 C의 차이에 비해 굉장히 미비하다. 에일과 라거가 헷갈린다고 맥주와 와인이 헷갈리는 사람은 없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와인의 품종과 산지는 줄줄이 꿰고 있으면서 브랜디가 어떤 술인지 처음 듣는 사람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반대로 양주는 자기 취향이 아니라면서 진이나 럼을 한 번도 못 먹어본 사람도 많다. 메즈칼과 보드카를 마셔본 후에 와인이 좋다고 말하는 것과 와인만 마셔본 후에 와인이 좋다고 하는 것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바가 두렵고 술이 어렵다면 A와 A'에 집착하지 말고
더 크고 쉬운 B와 C, D, E부터 찾아보는 건 어떨까? 어렵게만 보이는 술을 조금 더 쉽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