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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슬플 예정 16

아름다움 후의 우울증

2021년 4월 5일


우울증에 안 좋은 것들은

생각, 아무것도 안 하기, 누워있기, 슬퍼하기, 무기력하다고 느끼기, 희망을 포기하기 등등등…

이게 순서가 있는 듯하다.

1.     아무것도 안 하기

2.     누워있기

3.     생각하기

4.     무기력하다고 느끼기

5.     희망을 포기하기

6.     슬퍼하기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전에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비누 제조 회사에 비누 케이스에 비누가 들어가지 않은, 오직 상자만 있는  제품들이 생산과정에서 나오자, 컨설턴트를 고용해서 문제 해결을 시켰더니, 100만 불짜리 적외선 스캐너 장비를 설치하라고 했다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 어떤 라인에서 생산되는 제품에는 비누가 들어있지 않은 제품이 하나도 없어서, 그 원인을 조사했더니, 그 라인의 한 여직원이 집에서 사용하지 않는 선풍기를 가져다가 제품 포장할 때에, 바람을 쏘여서 비누가 들어있지 않은 상자만 있는 것은 날아가게 해 놓고 작업을 하고 있더란다. 


문제의 원인에 대한 해결책은 가장 깊숙한 곳에서 의외로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듯하다.


혹시 우울증도 그런 거 아닐까?

무기력하고, 슬퍼하고, 희망도 없고, 식욕도 없고, 부정적으로 생각만 하고…. 이런 것들이 사실은 선형으로 그 원인들을 구성하고 있어서, 제일 깊은 곳 딱 하나만 해결하면 아주 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1번 아무것도 안 하기’에서 해결책을 찾기로 했다.

이걸 잊으면 안 된다. 

이게 내가 이 우울증의 시기를, 공황장애의 시간을 건너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작은 성공을 경험하기’이니까 말이다.

집 가까이 산이 있어서, 산으로 출동!

제일 힘든 부분은 ‘결심하는 단계’이다.

이게 그렇게 힘들다.

세수를 하는 것도 힘들고,

옷을 입는 것도 힘들고,

양말을 신는 것도 힘들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그러지 말라’고 계속 얘기하는 것 같다.

마스크를 쓰려고, 박스를 여는 것도 힘들고, 일회용이라 비닐 포장을 뜯어내는 것도 힘들고, 쓰기 편하게 양 옆으로 벌리는 것도 힘들고, 귀에 거는 것도 힘들다.

자! 이제 신발을 신을 시간이다.

신발 혀를 잡고, 먼저 오른 쪽 발부터 넣는다. 뒤축이 접히니 당연히 검지 손가락을 넣어 펴줘야 하는데, 검지 끝이 왠지 아리다. 피가 안 통하는 건가?

주섬주섬.

이번엔 왼쪽 신발!

별 수 없이 구두 주걱을 잡아넣는다.

훨씬 편하다. 

‘아까 오른쪽도 그렇게 할 걸!’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면, 50%는 성공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타고, 내리고…

햇살이 눈부시다면, 이제 몸을 맡기면 된다.

그 햇살이, 시원한 바람이 나의 등을 밀어 산으로, 자연으로, 희망으로 안내할 것이다.

저 위에 멀리 서울 시내가 다 보일 것이다. 마치 나의 미래가 보이는 것처럼!

거친 숨을 몰아세우며, ‘해냈다!’라는 성취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등 뒤에서 내려앉는 햇볕은 따스할 것이고, 얼굴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할 것이다.


정말 그랬다.

저 상태로 무아지경에 빠져 아주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파란 하늘이, 하얀 구름이, 초록의 나무들이, 저 멀리의 희망들이 오늘도 나를 반겨주며, 나를 챙겨주었다.

외롭고 지친 내 영혼을 위로해 주었다.

팔에 턱을 괴고 앉아 그들이 내게 건네는 위로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었다.


슬펐다.

아름다운데 슬펐다.

역시 우울증은 그 생명력이 아주 강해서, 이렇게 아름다운데도 기어이 뿌리를 내렸다.

가만 눈을 감았다.

바람 소리에 귀 기울였다. 쉬이, 휘이잉….

등 뒤의 햇볕이 얼마나 따스한 지 촉각을 기울였다.

눈에서 출발한 눈물이 뺨 어디메쯤 흐르는지, 어느 정도의 양인지, 무슨 생각으로 그쪽으로 흐르는지, 온도는 어떠한 지에 집중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

내 숨소리!

심장 뛰는 소리!

그제서야 감정을 통제 못하는 나가 아니라, 자연과 하나 되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훨씬 편해졌다.

이 기분을 잘 기억해야 할 터이다.


산에 오르는 1시간 반, 산 정상에서 머무른 시간 1시간, 내려가는데 걸린 시간 1시간 반!

총 네 시간을 잘 견뎌냈다.


그러니, 우울증에 걸려있다면,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서, 괜히 슬퍼하지 말고,

움직일 일이다.

산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그곳에서 여러 아름다움을 발견할 뿐 아니라,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우울하지 않을 수 있다. 

하루 네 시간이면 1/6이나 괜찮은 거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산에서 본, 경험한 것들이 너무 아름다워 좋긴 한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상은 아름다운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더 우울해질 수 있다. 그것만 조심하면 된다.

나는 어떠냐고?

산에 다녀왔더니, 더 슬프다. 이런 젠장!

산은 참 아름다웠는데,,,

내 삶은…


밤이 찾아올 테다.

그 때엔 또 슬플 예정!

아름다움을 경험한 후라 더 슬플 예정!

어쩌면 내가 경험한 것 중에 가장 슬플 예정!


#우울증 #산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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