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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슬플 예정 67

드디어 터널을 빠져나오다

9월이 지나가기를 무던히도 기다렸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내가 어디쯤인지, 나는 괜찮은 것인지 몰라 매일, 매 순간을 고민하며, 성찰하고, 반성하고, 살폈다.

글을 쓰는 것도, 사유에 방해될까 최대한 아무것도 안 하고, 머릿속으로 생각만 했다.

그것도 이상한 것이, 전에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잠이 안 오고, 우울하고, 공황장애에, 심지어 약간의 환청까지 들리는 듯했는데.....

이제는 의도적으로 생각을 하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여유와 남음이라니, 받아들임이라니....


어느덧 9월의 마지막,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산으로 향했다.

짊어져야 할 것들에 대한 막연한 인내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현실들, ‘잘 되어야 할터인데…’라는 아득한 바람과, 그래도 나아가야 한다는 어렴풋한 결심!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엉켜 나를 뚜렷하게 하지 못한 때문에 무거웠나 보다.

처음엔 바람이나 쐬야지 하며, 나섰다가, 산으로 향했다.

같은 값이면 산 공기가 좋으니, 둘레길 정도 걸어야겠다는 가벼움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모든 게 그렇듯이 시작은 가벼움이다.

홈플러스에 바구니 들고 들어갔다가, 나중에 카트로 바꾸듯이!

한 젓가락만 먹어야지 하던 라면이 어느새 한 그릇으로 바뀌고!

거실을 지나가다 스쳐 지나듯이 본 OCN 영화 ‘쇼생크 탈출’, 이 부분만 봐야지 하다가 어느새, 배를 고치고 있는 앤디와 그를 향해 걸어가며 줌 아웃되는 그 해변, 지후아타네오!

감옥 안에서 앤디가 꿈꾸던 희망! 지후아타네오!


결국, 이 장면을 보고 나서야 소파에서 일어나게 되듯이…

 모든 것은 가벼움에서 시작된다.

그렇게 둘레길로 향했던 나의 가벼움은 한 걸음, 두 걸음 짙은 녹음에 물들면서, 제법 진지함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예전의, 

공황장애가 막 시작되었던, 시기의 그 산, 그 길을 따라 걷자니… 어느새 눈시울에 ‘지잉’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당분간 슬플 예정 3’에 걸었던 그 길을 걷겠다 마음을 바꿨다. 둘레길이 아니라, 제법 정상을 향해가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달래 가득했던 곳에는, 여름의 마지막을 마음껏 뿜어내는 진초록의 풀, 나무들이 가을에 안간힘을 쓰고 저항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분홍은 진초록으로,

꽃은 나무로,

절망은 괜찮음으로,

슬픔은 견딜 수 있음으로!

낭떠러지에서 고민하던 괴로움은, 예사롭고, 조용하고, 무표정한 받아들임으로!

 입가에 제법 미소가 희미하다.

‘괜찮아졌구나! 그때 비하면 정말 많이 좋아졌구나!’



 앉아서 펑펑 울던 그 계단길!

눈물, 콧물 닦아내던 그 손에 느껴지던 차가운 늦겨울바람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제는 관조하며 바라본다.

이렇게 괜찮아질 것을, 이렇게 거리낄 것이 없을 것을, 이렇게 별로 나쁘지 않을 것을 나는 그렇게 죽고 싶다며, 나는 그렇게 심장이 조여들었었나 보다.

괜찮아짐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눈으로, 심장으로!

하하하!

그렇게 중간 정상으로 향했고,  


 자주 앉아서, 자주 위안하고, 자주 절망하고, 자주 울고, 자주 결심하고, 자주 생각하고, 자주 서러워했던 곳!

아! 

저 산이 저렇게 슬펐던가? 했던 곳.

저 구름이 저렇게 서러웠던가? 했던 곳.

턱을 괴고 앉아 나를 잊고 싶었던 곳.

 삶이 무엇인지,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렇게 고민했던 순간들이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괴로움을 견디는 시간이 아니라, 

나를 다독이는 시간, 

나들 달래는 시간,

나를 북돋는 시간들이었다.

그러니,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아니다.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

 비가 오려는지, 잿빛 구름들이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지만, 우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의 근사함에 매료되어, 마음을 사로잡혀 홀리어 있었다.

하늘이 파랄 때는 슬프더니, 잿빛일 때는 황홀하다니….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하다.

 그리고, 능선을 따라 걷다가 만난,   

손을 짚고 한참을 울어댔던 그 나무.  

가만히 손을 대어 본다.


그때는 겨울이었던 때문일까?

손등의 차가운 바람이 아직도 선연한데, 이제는 가을을 맞이하는 마음이라 그런지, 손바닥 끝으로 전해지는 아련함, 가냘픔은 차라리 그리움이다.

나무 안에 전해지는 숨결, 땅 속에서 끌어올린 물과 양분이 나무 위로 올라가는 소리, 저 푸른 이끼가 자라겠다며 영차영차 힘을 내는 소리, 아직 미숙한 가을바람이 나무를 핥고 지나는 소리, 나무들끼리 '안녕!' 하며 눈인사하는 소리....

가만히 귀 기울이니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손바닥을 타고 들려왔다.

소리를 손바닥으로 듣다니...

 나의 아픔은 가을과 함께 많이, 아주 많이 나은 듯했다.

다행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두렵다.

그 나무를 만나게 될까 봐!

밑동이 잘려나간 그 친구를 보게 될까 봐!

 그 겨울의 황량했던 녀석이다.   



 그때 내가 어떤 글을 썼나 살펴보니....


 그렇게 엄청 울고 나서, 이제는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고,

그래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었는데,

잘려나간 나무들을 보며 다시 한번 오열했다.

마치 나 같아서,

쓸모없어 버려진잘리고, 잊힌 것이 꼭 나 같아서,,,,,

옆에 앉아서 마음껏, 정신이 나갈 것처럼, 아니 세상에서 처음으로 슬퍼했던 것처럼 목을 놓아 울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괜찮냐고 물었는데,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부끄러울 새가 없었다.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그 슬픔, 그 고통 온전히 내 안에 새길 듯이 조각하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끝까지 가고 나니, 돌아올 힘이 생기더라는 것이었다.

뭐든 끝까지 가 보기!

그게 우울하고, 공황장애에 걸린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치유법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보았다. 

 잘려 나간 나무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너도 힘들었겠다. 얼마나 아팠니?

나도 힘든데, 나도 죽겠는데 나무를 위로했다.

그제야

위안이 되고, 안정이 되는 느낌?

내가 위로한 건데, 내가 치유를 받은….

 산을 내려오는 길은 한결 받아들임이 가능한 나를 발견했다.

 아름다운 것들이 도처에 있었다

끝까지 가 봐야 다시 돌아올 수 있다

힘들지만, 남을 위로하자


 와!

그때의 그 서러움과 절망, 괴로움, 아픔, 막막함.....

아직도 생각만으로 가슴 한쪽이 저릿해오는데....

그 나무는 잘 있을까?

마치 옛 친구를 만나러 가는 듯한 설렘?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러지?

두근두근..

쿵쾅대는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보고 싶었던 것일까?

이렇게도 걱정되는 것일까?

이렇게도 의지했던 것일까?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두려웠다.

혹시 없어진 것은 아닐지,

혹시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닐지,

혹시 더 초라해져 있는 것은 아닐지......

그런 조마조마함이 더해져 갈 때, 멀리서 보이는 존재.  


 마치

“이제 왔니?”라고 말을 거는 듯이 늠름한 자태로 앉아 있었다.

외롭지 않게, 5개의 둥치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다시 피어날 꿈이라도 꾸는 걸까?

나무껍질 색깔은 유난히 선명하고, 산뜻하고, 뚜렷했다.


 “나는 아직 이렇게 아픈데, 너만 괜찮냐?”라고 할 줄 알았는데, 

“네가 괜찮아져서 나도 너무 좋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잔잔한 뭉클함,

애잔한 북받침,

가슴이 꽉 차는 반가움!

그랬구나!

'너는 여기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에 또 눈 주변이 '지잉'하는 소리를 낸다.


 어린 왕자와 여우처럼 조금 멀리 떨어져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여우가 가르쳐 준 '관계 맺기'의 방법이란 이런 거구나!'라는 깨우침이 일었다. 

 한 시간은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남아있는 두려움, 불편함, 걱정, 불안함들이 사그라들고, 삭아서 없어졌다. 없어지는 듯했다가 아니라, 없어졌다.

아니다.

어쩌면 좋은 감정들 뿐 아니라, 힘들게 하는 감정들도 같이 내 안에 살아가게 하는 법을 배운 건지도 모르겠다.

한 번 존재했던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건 존재하는 것일 테니까!

아인슈타인이 그랬다.


 9월 마지막이다.

이제 내일이 10월이다.

정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던 2021년이 가을과 함께 제 자리를 잡아가는 듯하여, 감사하다.

더 괜찮은 사람으로, 더 성숙한 사람으로, 더 어른스러운 사람으로 거듭남을 스스로에게 축하해줘야겠다.

 브런치에 댓글로, 마음으로 응원해주신 많은 분들이 새삼 감사하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에게 마음 써주시다니.. 인간은 참으로 위대한 존재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터널을 빠져나오게 도와준 모든 이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이제는 안 슬플 예정!

지금부터는 괜찮을 예정!


#우울증 #공황장애 #대상포진 #불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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