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트렌드》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안녕, 필화님!
어릴 때는 친구한테 편지도 참 많이도 썼는데 손으로 쓰는 편지도 아니고 키보드를 놓고 쓰는 ‘친근감 어린’ 이메일은 처음 써 보는, 굉장히 낯선 형식의 텍스트라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그러니까, ‘친근감’과 ‘이메일’은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 단어들이 아닌가 싶어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단어들도 우리 사람들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기질적으로 친한 사람과 본성이 달라 도무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그대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단어들도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너는 내 영혼의 단짝’ 혹은 '만나서 ◯◯웠고 다신 만나지 맙시다.’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만나자마자 팩 뒤돌아설 정도로 둘의 미래가 암울해 보이지는 않으니, 그냥 이 데면데면함은 곧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이메일’과 ‘친근함’을 한 번 친한 사이로 만들어 봐요. 늘 그렇듯이, 아님 말고(하지만 삐칠 테다).
아니면 그냥 격식을 차린 이메일도 나쁘지 않아요. 격식이란 것은 거리감에서 느껴지는 소외감 대신 일정 수준의 예의를 담보하게 마련이니까요. 역시 여기서도 등가교환의 법칙이 성립하는군요. 첫 번째로 무슨 책 이야기를 해야 할까 사실 정해두지도 않고 오프닝 레터를 쓰기 시작했는데, 서두를 풀다 보니 키워드가 나왔습니다.
등가교환의 법칙.
아마 필화 님 같은 분은 경제학을 먼저 떠올리시겠지만, 저 같은 뿌리부터 굳건한 서브컬처 출신종자들은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불멸의 명작을 떠올릴 겁니다. 네, 우리가 같은 학교 뭐뭐 경영 전공 출신이라는 사실은 접어둡시다. 출신은 중요하지 않아…
이게 아니고.
하여간 이 책은 정말이지 얘기할 거리가 어마무시하게 많은 훌륭한 책이지만, 첫 편지는 무난하게 가는 것이 좋을 테니 참도록 하겠습니다. 조심하시고, 드리프트!
아, 오늘 막 읽기를 마친 아주 흥미로웠던 책 이야기를 해 볼까 해요.
제목은 《말의 트렌드》라고 합니다.
바이브컴퍼니에서 일하셨던 분이 쓰신 책이에요. 바이브컴퍼니 아시죠? 여기서 나오는 연구들이 아주 흥미로워서 좋아하는데… 박살 난 주가 때문에 저한테 피눈물을 수 십 리터 뽑아간… 잊어버리십시오, 이건(눈물 2리터 뿌리며 석양을 향해 달려간다).
아무튼 밑줄 수십 군데 그은 거 다 떠벌리고 싶지만, 딱 한 군데만 언급할게요.
진짜 내가 무릎을 쳤다니까(아이고 내 무릎…).
주말은 당연히 사생활이다. 퇴근 후도 사생활이다. 개인의 공개 설정에 따라 그것을 자연스럽게 오픈하는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전혀 말하고 싶지 않은 비공개 영역이기도 하다. (중략) 상사와 부하의 관계에서 종종 오가는 이런 대화는 서로의 공개값이 맞지 않을 경우 한쪽에 실례가 된다. 단 하나의 계정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 공개밖에 모르는 사람과, 수많은 계정의 공개값을 제각각 다르게 설정하는 사람이 만나면 경계선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p.242
이 대목을 읽고 잠깐 책 읽기를 멈췄어요. 왜냐면 싱크로율 100%의 경험이 내게도 있거든요. 불과 1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필화님도 알다시피 제가 사는 게 굉장히 다이내믹하잖아요. 안 해도 되는 일 벌이고 다니는데 일가견이 있고 심심한 게 뭔지 이해를 못 하는 사람이잖아요? 한편으로는 그런 성격이 ‘참 복 받았구나’ 싶기도 한데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살다 보니 정말 바빠서 연락이 뜸해지게 되는 모임도 있단 말이죠.
그런데 이 분들은 내가 뭣 때문에 그렇게 인생이 바쁜지 이해를 못 하셔. 그러면 그냥 ‘아, 쟤는 바쁜 애구나. 하는 일이 많구나(돈은 안 되지만).’ 그러면 되는데, 그걸 너무 궁금해하는 거야. 아니 대체 왜? 전 정말 이해가 안 됐습니다. 내가 뭘 하느라 바쁜지가 왜 궁금하지? 왜? 칭찬해 주려고?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NO THANK YOU.
이렇게 말하면 젊은것들은 정이 없고 블라블라들 하시지만, 죄송하지만 저도 나이 섭섭지 않게 먹었다는 거... 필화님도 아시잖습니까.
공개값, 다중정체성.
이런 건 요즘에서야 튀어나온 개념 같지만 그저 레이블이 새로 붙게 된 것뿐이지, 사실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거라고 전 생각하거든요. 애매모호하게 존재하던 것이 명쾌하게 드러나도록 이름을 붙이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구구절절 고개를 끄덕이게 돼요.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의 현재진행형 언어들의 출생과 부고를 지켜보는 심정이었습니다. 언어가 축소되고 소멸하는 것은 슬픈 일이죠. 그만큼 세계가 좁아진다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세상에 조금 더 많은 말들이 태어나면 좋겠습니다.
좋아한다는 표현의 농도와 밀도가 0에서 50 정도로 풍부해지면 좋겠어요.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시대의 속성을 반영하는가. 그리고 언어는 얼마나 포용적인 동시에 배타적인 양가적 미디어인가 하는 생각을 내리 하게 되었습니다.
이상하죠, 내가 전문적으로 공부했던 것은 전혀 그쪽이 아님에도, 항상 나를 매혹했던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일이 누구에게나 항상 일어난다는 사실이.
언제였던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내가 금융 자본이나 지식 자본은 남만큼 갖지 못하겠지만, ‘어휘 자본’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갖고 싶다고. 그건 정말 죽는 날까지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 언젠가는 그 꿈을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 볼게요. 꿈만 꾸는 것은 반칙이고, 실천을 해야겠지만.
추신: 여기서 어떤 키워드를 연상하건 연성해 내건 그것은 당신의 자유. 하지만 바라건대 《자본론》만큼은 아니었으면!
추신 2: 이것 역시 장르애호가의 말장난이었는데, ‘연성’은 장르일반적으로는 뭔가를 만든다는 쪽을 뜻해요.
담화 보냄
안녕하세요. 담화님.
호호호 이렇게 부르니 매우 어색하지만, 극복해 나가 보도록 하지요.
아니 그런데 담화님은 왜 친구들과 이메일을 안 하셨던 건가요? 저는 친구들과 이메일을 자주 해서 그 데면데면함이라는 것은 약 1% 정도만 느낄 수 있습니다. 그 1%는 앞서 말했듯이 새로 지으신 닉네임 ‘담화’가 아직 입에 익지 않은 것에 대한 지분입니다.
여하튼 이 이메일로 주고받는 담화가 너무 즐거울 것이라는 것은 첫 번째 오프닝 레터를 읽으면서부터였죠!! 제가 늘 담화님의 글이 재미있다고 했던 바로 그 포인트가 여실히 살아 있었기 때문이죠. 때로 이보다 더 전문적이고 심도가 깊어도, 혹은 더 가벼워져도 변함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같이 즐겨보아요~
《말의 트렌드》 라니,,,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트렌드 업계에서 일했던 사람으로서 ‘트렌드’라는 단어 자체에 질색팔색합니다만, 그래서 상당히 거리감을 주고 싶은 제목이었습니다만, 담화님이 써주신 내용을 보니 생각보다 내용이 알찬 것 같고 좋은 것 같습니다.
하긴 말이라는 것은 2023FW/2024SS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패션이나 없어도 그만인 일상잡화의 트렌드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말은 그 세대 의식이나 생활상을 반영하게 마련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말씀해 주신 바로 이 문장 '애매모호하게 존재하던 것이 명쾌하게 드러나도록 이름을 붙이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다'에서 떠오르는 책이 있었습니다.
루시드폴이 옮긴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부제: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이라는 책입니다. 어휘 자본을 두둑하게 갖고 싶으신 담화님께서도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책인 것 같아요.
해당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나 생활 속에서만 체득할 수 있는 단어의 의미가 있죠. 또 번역을 하다 보면 때로는 전체 맥락 하에서 이 문장을, 혹은 이 단어를 어찌 번역할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될 때가 있죠. 심지어 우리나라 말에 없는 단어라면 더욱 그렇고요.
이 책에서는 바로 그렇게 다른 나라 말로 한 번에 촥! 번역이 되지 않는 말들을 실어두고 있습니다. 그런 단어 중에 재미있는 단어들을 좀 소개해볼까 하는데, 우리나라 말도 한 단어 있습니다. 맞춰보실래요? 하하
바로 '눈치'라는 단어입니다.
‘눈치’라고는 당최 보지 않는 문화에 사는 사람이라면 수많은 예시를 들어줘도 단박에 알아듣기 어려울 단어지요. 이 책에서는 눈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눈에 띄지 않게 다른 이의 기분을 잘 알아채는 미묘한 기술’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부연 설명이 이렇군요. ‘때때로 상대방의 겉모습만으로는 그가 불안한지 화가 났는지 다정한지 슬퍼하는지 알아채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한 사람을 오래 겪다 보면 미묘한 차이까지도 알아챌 수 있겠지요.’라고요.
과연 설명은 좋습니다만, 서양문화권 사람들은 그 깊은 뜻을 이해하고 생활 속에서 ‘눈치를 챙길 수’ 있을까요? (의구심이 가득합니다만, 실험을 해 볼 외국인이 주변에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다른 단어도 좀 볼까요?
말레이어의 PISAN ZAPRA [피산 자프라]: 바나나 한 개를 먹는 데 드는 시간(2분이라고 함)이나 핀란드어의 PORONKUSEMA [포론쿠세마]: 순록 한 마리가 쉬지 않고 단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7.5km)라는 단어처럼 단위의 기준이 되는 단어도 있습니다. 태어나 순록을 실물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문화권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단어가 되겠네요.
2만 7천 개에 가까운 명사를 갖고 있다는 한국말로 어찌 저찌 번역은 가능할 것 같은 단어들을 빼고, 나도 모르게 '이런 단어가 있어?' 라며 놀라게 된 단어가 있습니다.
KUMMERSPECK [쿰메르스페크]: 단어대로 옮기자면, 슬픔의 베이컨. 부정적 정서로 폭식을 하게 되어 불어난 몸무게.. (아앗 내 얘긴가.. 뼈 때리네)
그리고, DRACHENFUTTER [드라헨푸터]: 그대로 풀면 용의 사료, 남편이 자신의 나쁜 짓을 숨기기 위해 아내에게 건네주는 선물을 말한다.
세상에 이런 단어가 독일어에 존재합니다... (독일인들 당신들은 대체....)
그리고 제가 정말 이 단어는 한국에서 외래어로 써줬으면 하고 바라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단언컨대 이 단어는 저 말고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 감히 예상해 봅니다만, 단어가 길어서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바로 이디시어의 TREPVERTER [트렙베르테르] 상대방의 말을 멋지게 되받아칠 수 있는 말이지만 꼭 뒤돌아선 뒤에야 떠오르는 것을 뜻한다. 그대로 풀면, 아래층 계단의 말. 기억해두고 싶지 않나요? 저는 기억해 두려고 몇 번이나 발음해 보았습니다.
《말의 트렌드》 에서 언급한 대로 ‘주말은 당연히 사생활이다. 퇴근 후도 사생활이다. 개인의 공개 설정에 따라 그것을 자연스럽게 오픈하는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전혀 말하고 싶지 않은 비공개 영역이기도 하다. (중략) 상사와 부하의 관계에서 종종 오가는 이런 대화는 서로의 공개값이 맞지 않을 경우 한쪽에 실례가 된다.’ 바로 이 상황에 상사에게 따지고 싶었던 바로 그 순간에 내뱉지 못한 말들이 퇴근하고 나서야 머릿속에 좌르르 나열될 때, 그럴 때 쓸 수 있는 표현이겠네요. Trepverter.
어떤가요? 좀 재미가 있으셨을까요?
저는 이 책의 삽화도 예쁘고, 독특한 콘셉트의 새로운 책이라서 덥석 집어 들고 왔지만, 구매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습니다. 바로 루시드폴의 번역이었어요. 아시다시피 범상치 않은 두뇌를 가지신 이 분이 번역을 했다는 점이었죠.
학위를 받기까지 팩트 기반의 공학적 언어가 삶의 대부분이었을 그분의 노래는 잔잔한 가사들이 주를 이룹니다. 싱어송라이터인 만큼 작사작곡을 대부분 직접 하시더군요. 이 분의 언어는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바뀌어갔을까요? 아니면 공부는 공부고, 작사는 작사인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 분은 그야말로 문이과통합형 인재인 걸까...)
그러고 보니 ‘언어의 변화’라는 주제로 생각나는 책이 두 권 있습니다. 샤오루 궈의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 과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두 권 다 민음사의 책이군요.
'소통’이 주제인 이 두 권의 책은 새로운 언어를 배워나가는 주인공이 있는가 하면 언어를 잃어가는 할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이 두 권까지 소개하자니 저희 고양이가 주사 맞으러 갈 시간이 되어(고양이는 소중하니까요) 이번 편지는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만 언젠간 소개할 기회가 생기겠죠?)
보내기 버튼 누르기 직전에 한 단어 앞에서 멈칫했습니다. 일본어의 TSUNDOKU [츤도쿠]라는 단어입니다. ‘사다 놓은 책을 펼치지도 않은 채 내버려 두기. 보통은 같은 운명의 다른 책들과 함께 쌓여 있기 마련이다...’라고 하네요..
담화님 덕분에 저의 츤도쿠된 책들이 빛을 보겠구나 생각하면서 ‘책장담화’의 첫 답장을 마무리해 봅니다.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를!!
-필화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