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공항에서 일주일을 –히드로 다이어리》
Aㅏaㅏ아아아아아아…. 필화님.
미치겠어요, 저.
'개론인지 각론인지를' 언급하신 대목에서 저는 그만 저의 모호한 문장력의 역풍을 강렬하게 맞고야 말았습니다. 아우아야아.
사다코 말인데, 필화님이 박장대소하셨다는 대목을 읽으며 그렇게까지? 라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던가 봅니다. 주민증이 곧 나오는 1호가 대체 뭐가 그렇냐기에 어 그건, 하고 이 일화를 이야기해 주다가 그만 이 애가 사다코를 알 리가 없다는 데 뒤늦게 생각이 미쳤다지요.
그래서 조심스레 물어봤습니다. "해브유에버허드어브사다코?" 18세 님은 저를 어이없이 보다가 “링”이라고 쏘쿨앤시크하게 답하더군요.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다코는 이젠 하나의 밈, 어쩌면 짤로 박제된 게 아닐까’ 하고. 제가 커뮤니티 활동을 좀 하다 보니 짤을 제법 모으거든요. 그런데 사다코 짤이 있었… 던가?
그건 그렇고, 지금 제게 뭘 물어보신 건지. ‘서재 결혼시키기’라고요? 아, 혹시 저희 집에서 몇 년 간에 걸쳐 수 차례 발발했던 N차 서재 대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물론이죠! (비장)
승자를 묻는다면 당연 당당히 저라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전쟁은 자고로 쪽수로 하는 법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쪽수는 # of pages를 뜻하죠. 권수로는 5천이 넘는 대군을 거느린 저와 고작 천이 될까 말까 한 군사가 전부인 우리 바깥양반이 적수가 될 거라고 생각하시다니, 치욕스럽습니다.
도서 구입 상위 0.015%의 포지션을 가진 애서가를 뭘로 보시는 건가요! (두 손 허리 착) 게다가 저는 어제 A 온라인 서점에서 확인한 바, 주기적으로 착실히 병참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정확한 수치는 묻지 마십시오. 전력이 노출될까 봐 저어해서가 아니라, 개비스x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러니까요.
서재 결혼이 가능했던 가정들에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 제게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꿈, 이른바 유니콘 실물 영접보다도 성취하기 어려운 대업… 아니 몽상이니까요. 먼 산…
네, 각설하고.
저는 책들에 얽힌 사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군데 모아 둔 단편집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찾아보니 안타깝게도 출판사/제작사 유통이 중단되었다고 해서, 조금 망설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고집껏 이 책을 보여 드리렵니다. 작가는 가쿠타 미쓰요라고, 아마 이 분의 《종이달》은 많은 분이 아실 겁니다. 영화로도 나왔죠. 그런데 가쿠타 미쓰요는 단편도 꽤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책 제목을 아직 말씀 안 드렸네요.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라고 하는 책입니다. 제목이 사뭇 웅변적이지요. 설득… 당해야 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드네요. 총 아홉 편의 짧은 이야기가 한 권에 묶여 있습니다. ‘여행하는 책, 누군가, 편지, 그와 나의 책장, 불행의 씨앗, 서랍 속, 미쓰자와 서점, 찾아야 하는 것, 첫 밸런타인 데이.’
어떤 것은 제목만으로도 내용이 유추 가능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이 중, <그와 나의 책장>이라는 단편의 제목을 보시면 제가 필화 님의 답신을 보자마자 이 책을 떠올린 이유를 짐작하리라 믿습니다.
주인공은 남자 친구와 동거를 시작하며 함께 머리를 맞대고 책장을 어떻게 합칠까 행복한 고민을 합니다. 어딘가 겹치는 장면이지요. 그들은 겹치는 책은 한 권만 남기고 팔기로 합의하지만 헌책방까지 가고서도 결국 팔지 못하고 도로 가져옵니다. 이유는, 이 이야기를 읽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할 것 같습니다. 사실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겠지요.
두 사람이 결별하던 순간, 주인공은 남자친구에게 이렇게 물어요. ‘새로 만나는 그 사람도 책을 읽느냐’고. 변심한 남자친구는 그 질문에 멈칫합니다. 새 집으로 이사한 주인공이 책짐을 풀어 정리를 하다 말고 헤어진 전 남자친구와의 책 추억을 곱씹는 장면에 도착하면 마음이 조금 먹먹해집니다. 이런 서술 때문에요.
15권에 굉장히 좋은 장면이 있다. 먼저 읽은 나는 만화를 내던지고 코를 풀러 갔다.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하나켄은 그 모습을 보고 웃었지만, 15권의 바로 그 장면에서 그 역시 허둥지둥 일어나 나 몰래 코를 풀었다. 굉장한데! 굉장하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눴다.
15권의 그 페이지를 연다. 아직 내 눈에 글자도, 그림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툭툭 물방울이 떨어진다. 그 물방울이 뺨을 적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그래서 헤어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비로소 깨닫는다. 책장을 공유하는 것과 같은 것, 서로의 책을 교환하고 구석구석까지 읽고 같은 광경을 기억하는 것, 기억도 책도 뒤죽박죽 되어 하나가 되었는데 그것을 억지로 떼어내는 것. 자신을 잃느냐, 다시 일어서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자신의 일부가 된 것을 떼어 내어 영원히 잃게 된 것이다. P.69
그리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아, 필화 님과 내가 친구여서 얼마나 다행일까. 이렇게 책을 사이에 쌓아나가며 다지는 우리의 시간은 적어도 새드엔딩을 맞을 일은 없을 테니까, 영원히 나의 어떤 부분을 잃는 일은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필화님이 제 친구여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제가 ‘몹시 운이 좋다’는 생각을 하며 이번 글을 맺어볼까 합니다. 답지 않게 좀 감상적이 되었… 다고 하면 좋겠지만, 사실 저는 원래가 감성 터지는 사람이니까요. “네가?”라고 하면, 옐로카드를 속달로 부치겠어요. 으르렁.
안녕 담화님.
'N차 서재 대전이라니요?!' 그 표현에서 이미 ‘담화님이라면 압승하겠군 ‘이라고 예상했던 대로 역시 그러셨군요. 그 댁의 가족 구성원 한 분께 심심한 위로를…
담화님의 편지를 읽으며 '옐로카드를 속달로 받겠군.' 생각하던 차에 제 머릿속에는 딱 한 권의 책이 떠올랐습니다. ‘옐로카드’라는 한 단어는 지난번 편지의 그 어떤 맥락도, 그 어떤 작가 이름도, 혹은 국가명도 통하지 않고 단 하나의 이미지를 제게 떠올려주었답니다.
항공기 승객이 환승 대기를 하는 동안 수하물들 또한 노란 매트리스에 눕혀진 채 대기를 한다고 합니다... 제 기억 속 수하물들이 누워 있는 그 노란 매트리스(?)가 지금 제 눈앞의 현실에 던진 옐로카드처럼 느껴집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지금 공사다망하지 않습니까?
여하튼 그나저나 이 책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 –히드로 다이어리》입니다. 히드로 공항 측의 제안으로 공항의 첫 ‘상주 작가’가 된 알랭 드 보통이 사진작가 한 명과 함께 일주일 동안 신나게 공항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객들을 만나고, 우리가 흔히 아는 공간 이외의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하며 써낸 감상 가득한 다큐멘터리 소설입니다.
그의 전작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연인 관계 또한 진실 탐구를 하듯 끈질기게 객관적으로 고찰하고 답을 찾아나가는 역량을 보여준 만큼, 이보다 더 잘 다큐를 써낼 수 있는 작가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제 예전 독후감에 알랭 드 보통에 대해 이런 표현을 써두었더군요. ‘애인이라면 절대 사양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끊임없는 이 노력에 대해서만큼은 박수를 쳐주고 싶기도 하다 ‘라고 썼으니 말입니다.
저의 지인 중 하나는 여행도 많이 다니고, 현재 해외에 거주 중이면서도 가끔 우울해질 때는 공항에 간다고 하더군요. 그녀가 “가만히 앉아 비행기가 뜨고 지는 것을 보면 가슴이 설레고 기분이 좋아져요. “라고 차분하게 읊조리던 때가 생각납니다. 비 오던 날의 촉촉함, 카페 안의 웅성거리는 소리, 그녀의 조용한 목소리가 연상되는 책의 한 구절이 있어서 옮겨봅니다.
공항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저녁은 내가 그곳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되었다. 물결이 치듯 오가던 단거리 유럽 비행기들은 8시 정도면 대부분 움직임을 멈추었다. 터미널은 점차 비어갔다. 캐비어 하우스는 마지막 철갑상어 알을 팔고, 청소 팀은 그날의 가장 꼼꼼한 바닥 걸레질을 시작했다. 여름이라서 앞으로 40분은 더 있어야 해가 졌다. 그때까지 라운지 전체에 노스탤지어를 품은 부드러운 빛이 큰 물처럼 그득하게 들어찼다. P.155
담화님은 공항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언제이신가요? 언제고 다 좋으실까요? 아니면 여행은 귀찮으실까요?
저는 이른 새벽과 늦은 밤의 공항을 좋아합니다. 물론 해 질 녘에 공항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해가 지는 것을 보는 것도 너무나 좋습니다만, 이른 새벽에 해가 떠오르면서 그 밝은 빛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속속 들어오고 사라지면서 공항의 커다란 천장에까지 사람들의 흥분과 설렘의 소리가 가득 차는 걸 지켜보는 게 좋습니다.(물론 도착해야 할 동행자가 안 오면 속이 부글부글 합니다만...)
반면에 밤 시간에는 마치 밀물 빠지듯 대합실의 소음이 쭉 빠져버리고, 불빛도 사라지고, 흥분과 설렘이 사라진 자리에 쓸쓸함이 잦아들기도 하지요. 그 기묘한 변화도 아주 마음에 듭니다. 바로 그 기분을 또 앞 문장에 이어서 보통님께서 적어주셨어요.
대합실의 분위기는 쓸쓸하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 느낌은 자비롭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기 때문에 혼자만 외로운 경우에 겪을 수도 있는 불편이 없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혼잡한 도시의 술집이 분명히 더 쾌활하기는 하겠지만, 그런 환경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만남을 시도하는 것이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밤이면 공항은 유목민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본거지가 된다. 어떤 한 나라에 헌신할 수 없는 사람, 전통을 보면 뒷걸음질 치고 안정된 공동체를 수상쩍게 여기는 사람, 따라서 다른 어느 곳보다 현대 세계의 중간지대, 등유 저장 탱크, 비즈니스 파크, 공항 호텔로 인해 풍경이 상처를 입은 곳에서 오히려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밤이 오면 우리는 보통 노변으로 이끌리기 때문에, 자신을 어둠에 맡기고, 계기들에만 의존하여 날아가는 항공기에 실려, 마침내 아제르바이잔이나 칼라하리 사막 상공에 이르러서야 잠에 굴복한 준비를 하는 여행자들은 특별히 용감해 보인다. P. 157
라고 말이죠... 이 책은 2009년에 출간된 것이라 엔데믹 이후에 읽어보니 느낌이 새롭습니다. ‘밤이면 공항은 유목민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본거지가 된다’니요,, 이제 여행은 그렇게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게 된 것 같아요.
복잡하고 골치 아픈 현실을 뒤로하고 마음의 여유를 찾기 위해 훌쩍 떠나는 쉼표 같은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용감이라는 것을 가슴 저 밑바닥에 두거나 두 손에 들지 않고, 그거 시간과 돈이라는 ‘기회’만 되면 어느 순간에든 여행자가 되고 마니 말입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억눌린 우리의 여행 본능은 이제 눈 뜰 시기가 된 것이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말이죠.
저 또한 저 칼라하리 사막 상공에 이르러 잠에 굴복할 준비를 하는 용감한 여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못 이긴 척 바캉스를 떠나는 엄마가 되고 싶습니다. 조금은 구시렁대면서 아이들의 물놀이 짐을 챙기고, 남편에게 충전기와 셀카봉을 비롯한 전자제품을 잊지 말고 챙기라고 한 마디 하면서 비치에서 입을 수영복을 고르고 싶습니다. ‘아차’ 소리를 지르며 종류별로 선크림을 챙겨 넣는 엄마가 되고 싶기도 하고요.
그러나 현실은 아직도 팬데믹 기간 동안 만료되어 버린 여권을 갱신하지 못했군요..(아 내일 여권 사진 찍으러 갈 거야!!!)
그리고, 여행지에 가서는 알랭 드 보통까지는 아니어도 얼추 비슷하게 저의 동반자를 관찰하며 이해하려 노력해 보고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한 편을 써볼까 봐요. 그 소설의 마지막인 이렇게 쓸 거예요. 누가 그러던데, 모든 문장 뒤에는 이 말을 붙이면 글이 완성된다고 하더라고요.
“여름이었다.”
-필화의 세 번째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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