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Round] 사랑받아 마땅한 어린이들을 위하여…

《SWEEP》《완벽한 아이》

by 필화

안녕하세요 필화님…


늘 재깍재깍 답신을 보내던 제가 웬일로 며칠 늦었네요.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죠 뭐. 그런 거 맞죠?


사실 3라운드까지는 과장 1그램도 안 섞고, 필화님 메일을 보자마자 ‘다음 책은 이거다!' 하고 다음 타자를 금세 떠올렸는데 말이죠. 이번에는 꽤나 고민을 했습니다. 이쪽으로 갈까, 저쪽으로 갈까, 하고 말이죠. 사실 선택하고 싶은 쪽은 A인데, 여기로 가면 아직 초반인데 너무 한 방향의 책을 택하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스러운 반면 B를 택하면 이건 누구나 고를 수 있는 아주 고리타분한, 정석적인 선택지로 보여서 의외의 즐거움을 목표로 하는 제 의도와 어긋나기 때문이죠.


장고 끝에(사실 뻥입니다. 저는 고민을 오래 하지 못하는 타입입니다)A를 택했습니다. 제가 MG(Middle

grade, 왜 이 분류에 해당하는 말이 우리 출판계에는 없을까요? 있는데 제가 모르는 걸까요?)와 YA(Young Adult)장르를 즐겨 읽는 게… 도덕적으로 문제 되는 사안은 아니니까요!




제가 들고 온 책은 Jonathan Auxier 작가의 《SWEEP》입니다. 번역이 안 되어 있어서 몹시 아쉽습니다만, 아까도 말씀드렸듯 10살 전후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쓴 소설이니만큼 (10대 초반까지 가능) 쉽고 친절한 문장이 가득합니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꼭 번역돼 나왔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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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윕, 아시나요?

빅토리아 시대의 굴뚝 청소부 아이들 말입니다. 그 시기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정말로 매혹적인 시대입니다. 영감의 시대이고 대변혁의 시대였죠.


그러나 그 그림자는 길고도 짙습니다. 아동은 인권 이슈의 변방에 오래도록 머물러야 했죠. 그 문제에 대해 논하고자 한 움직임이 없지는 않았으나 실제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는, 늘 그렇듯 생각 외로 오랜 시간이 걸리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아동의 발견에 대해서라면 필립 아리에스의 역작 《아동의 탄생》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 책은 다 읽지는 못했고 제게 필요한 부분만 발췌독을 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기억할 정도로 상당히 강렬했었습니다.



제가 첫 번째 메일에서 이야기한 내용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전에 없던 새로운 어휘(+개념)가 탄생한다는 것, 그 어휘의 정의가 일반 상식화되는 과정은 늘 저를 짜릿하게 합니다. 그게 바로 사회의 진보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한 발자국이니까요.





이 책을 선택한 경위는 이러합니다.

아, 먼저 답을 드리자면 저는 공항을 좋아합니다. 여행은 두말할 필요가 없죠. 통장에 돈이 모이기만 하면 비행기 티켓을 끊었던 인간이니까요.


제가 지금껏 가장 긴 시간 체류했던 공항은 프랑크푸르트였는데, 까닭은 헬싱키에서 출발했던 루프트한자 항공기가 악천후로 무려 3시간이 넘게 공항 상공에 머물러 있어야 했던 탓에 제가 인천행 비행기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망연자실한 저는 루프트한자의 카운터로 가서 사정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항공사의 다정다감함에 익숙해 있던 저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우리가 늦게 착륙한 건 날씨 탓이지 우리 파일럿이나 기체의 결함 탓이 아닌걸?”이라는 쌩한 한 마디를 듣고 전의를 상실하고(너무 피곤하고 힘들었습니다… 제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걸 이야기해야겠군요), 어기적거리며 대한항공의 카운터로 갑니다.


친절한 직원께서는, 가히 모범적인 공감의 표본이라 할 만큼 안타까워하시며 “고객님, 내일 같은 시각 출발 편으로 변경은 해드렸어요. 하지만 어쩌죠…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라고 말해주셨죠.



그렇게 저의 프랑크푸르트 공항 무박 2일 체험기가 시작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요즘 같은 스마트폰도 없어, 카드도 없어… 저는 노숙자 신세로 프랑크푸르트 공항 내부를 돌아다니게 되었고 그 고생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던 탓에, 그 뒤로도 몇 해간은 루프트한자와 스타 얼라이언스로 묶여 있던 다른 항공사들마저 몹시도 미워하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공항 체험과 스윕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느냐.

길어질 것 같아 미리 죄송합니다.




그 여행은 필화님도 잘 아시는 S 씨와 함께 프라하-부다페스트를 거쳐 핀란드를 여행하는 코스였습니다. 프라하 하면 골렘의 발상지 아니겠습니까. 그곳에서 저는 다행히 영어로 쓰인 골렘 동화책 한 권을 발견해서 구입했었더랬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잠조차 오지 않는 그 밤에 저는 고적한 공항에서 골렘 동화책을 읽었습니다.



《SWEEP》의 주인공은 보호자에게서도 버림받은 어린 소녀 낸입니다. 낸은 자신도 어리면서 저보다 더 어리고 연약한 아이를 보호하려 하는 용감한 소녀입니다.


고통스럽고 지옥이나 다름없는 굴뚝 청소부 생활을 이어가던 낸에게 기적처럼, 필연처럼 초현실적인 보호자이자 친구인 존재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골렘입니다. 숯 char에서 태어난 존재이기에 이름은 찰리 charlie가 되지요.


찰리와 낸이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의미 있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이 사람과 연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또한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어른이란 어떤 어른인지를 묻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참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Monster’ is a word for something that frightens folks. Like a creature of some kind.”

“Oh,” he said. And then, “Am I a monster?”

Nan hesitated a long moment before answering. She thought about Crudd and Trundle and the cruel indifference of every person in the city who didn’t care if she lived or died. “I’ve met monsters before,” she said, resting her head atop his. “And you are not one of them.” -p.99


“That’s how it works, doesn’t it? We are saved by saving others.” -p.180





그런데 한편으로는, 과연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번역출판된다 한들 얼마나 팔릴지 의문이기도 합니다. 카타르시스는 대단하지만 읽는 내내 마음이 괴롭고 힘든 이 이야기를 과연 얼마나 많은 독자가 이겨낼 수 있을지 의문이기도 하거든요.



가상의 고통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꽤나 고문하는 이야기를 버틸 수 있는 힘은 정서적 기반의 견고함에서 오는 게 아닐까요. 저는, 지금의 독자들이 기나긴 ‘고구마’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 단순히 그들의 인내심이 짧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럼 과연 그 정서적 기반이란 것은 무엇의 총합일까요.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내내 고민하고 생각하는 문제이기도 하거든요.


제가 자본이라는 말을 정말 좋아하긴 하나 봅니다. 인정했으니까 또 쓸게요. ㅎㅎ 정서 자본이 풍부한 사람, 의외로 흔치 않답니다. 그거 알고 계셨나요?



(쓰다 만 것 같지만, 여기서 끝 맞습니다. 스크롤하지 않으셔도 돼요, 필화님!)











담화님.. 안녕~



이십 대 초반이었을까요...

친오빠랑 "책과 영화는 현실도피의 수단이 되는가? 아닌가?"에 대해 논쟁을 벌였던 기억이 나는군요.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담화님의 편지를 읽으며 저도 추천은 받았지만 읽지 않았던 책 《SWEEP》의 내용들이 지나가고, 본 적도 없는 그 시대의 영화 한 장면이 마치 본 것처럼 상상 속을 채우고, '대체 무엇으로 답장을 쓸 것인가' 고심하며 걸으면서도 제 머릿속은 서가를 헤매고 있었지요.


한참 그러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것을 보니 역시나 책이나, 영화나, 수다나 현실도피의 수단이 되고도 남음이 인증된 것 같습니다.


하.... 극 INTJ인 제가 눈물을 쏟고야 마는 콘텐츠가 바로 어린이들이 고난을 겪는 내용이건만!!!

다 아시면서!! 흑... 보내주신 인용문만 봐도 슬픕니다.


She thought about Crudd and Trundle and the cruel indifference of every person in the city who didn’t care if she lived or died. “I’ve met monsters before,” she said, resting her head atop his. “And you are not one of them.”


이라니... 아아아아....

어린이들은 언제나 사랑받아 마땅한 소중한 존재이건만,, 어린이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이가 참 가혹한 현실을 살고 있음이 명징해지는군요.





작년인가에 읽었던 눈물 나서 몇 번이고 책장을 덮었던 바로 그 책이 떠오릅니다.

모드 쥘리앵의 《완벽한 아이》입니다.


김영하 작가님이 온라인에서 함께 독자들과 독서모임을 하시는데 이 책을 다룬 적이 있었죠. 제목에 꽤나 혹했지만 바빠서 읽지 못했고, 바로 그다음 주에 아주 우연찮게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가 이 책들이 아주 깨끗한 상태로 십 여 권이 나란히 꽂혀있는 걸 보고 약간 의아해하며 들고 왔습니다.

물론 왜 이 책들이 그렇게 깨끗한 상태로 쌓여 있었는지는 책을 읽자마자 알 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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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님도 읽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이 책에는 물질적으로 부유하지만 왜곡된 가치관을 가진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자신의 고생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돈을 투자하여 공부를 시킨 여자 아이와 결혼을 하고, 그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이를 '완벽한 아이'로 만들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다합니다.


이 전심전력이라는 게 참 기가 막힙니다. 마음과 힘을 다하였으나 그 방향이 처음부터 잘못 조준되었던 것이고 그 목표가 왜곡된 것이었기에 그 완벽은 철저히 한 인간의 삶을 유린하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는 아버지가 생각하는 '완벽'이라는 기준에 따라 전쟁이 나도 살아남을 수 있고, 사기당하지 않고, 어디서든 잘 생존하고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커가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생존의 기술들을 익혀나갑니다. 제가 아이라고 적고 있는 것은 정말 어린아이인 여섯 살 무렵부터 이 일이 시작되기 때문인데요,

이쯤에서 밝힐 것이 있다면 바로 이 것이 저자의 경험담이라는 것입니다. 자전적 소설이 아닙니다. 경험담입니다.



아버지의 '완벽함' 아래, 철저히 어린아이의 정서는 완전히 방치된 채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유린당하고 학대당합니다.


높은 담장 아래 집을 숨겨 밖을 볼 수 없고, 어두운 밤에도 잘 다닐 수 있도록 여섯 살 남짓한 이 아이는 공포에 부들부들 떨면서 야밤에 정원을 혼자서 걸어야 하지요. 정해진 시간에 딱 필요한 만큼만 먹어야 하고, 시간을 함부로 쓰면 안 되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움직여야 합니다. 화장실도 맘껏 갈 수가 없고 아파서도 안 되고, 쓸데없이 웃거나 발장난을 하거나 침대에 널브러져 있을 수가 없지요.


전시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서커스 단원처럼 묘기를 배워야 하고(이것은 그녀 아버지의 생각입니다.), 어디서든 교양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음악을 듣고 악기를 배우고, 소설을 읽습니다.(물론 그 와중에 금서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아주 조금이나마 정신의 힘을 길러준 것은 바로 음악과 책이었어요. 아이가 학대받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음악 과외 선생님의 용기 있는 도움으로 아이는 아버지의 완벽한 세상에서 도망쳐 나와 자신의 세상을 꾸려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이 책 구석구석이 잔혹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녀가 책과 음악을 통해서 자신을 돌이켜보고, 자아가 성장하고,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정신적으로 탈출하게 되는 순간들을 한 번 추려보았습니다.



나는 곧장 책 속에 빠져든다. 에드몽 당테스는 나다. 나는 그와 한 몸이고, 그의 모든 감정을, 이유도 모른 채 닥친 끔찍한 처벌 앞에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어리둥절함을, 왜 이래야 하는지,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지하 감옥에 던져진 공포를 똑같이 느낀다. 그나마 남아 있던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가 느낀 반항심과 분노와 절망까지도 그대로 느낀다. 에드몽 당테스가 벽에 머리를 찧을 때, 세상과 단절된 외로움 때문에 죽도록 고통스러워할 때, 에드몽 당테스는 나다. 그 책 속의 모든 것이 내 마음을 뒤흔든다. p.136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을 때마다 결말에 담긴 냉혹한 교훈이 나를 죄어온다. 그 교훈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언젠가 자신의 광기를 깨닫는 날이 온다 해도,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사람이야. 도망쳐!” p.159


훌륭한 사람들은 가치를 수호한다. 예를 들어 빅토르 위고는 정의를, 졸라는 평등을 수호한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독일어 추리소설을 베껴 쓰기만 하는 것 말고 아버지는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p.276


우리는 무대로 돌아가 스스로를 내려놓고 광대처럼 신나게 연주한다. 어떤 일을 하면서 동시에 신나게 즐기는 게 가능하다니… 나는 서서히 달아오른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다. 현에 닿는 손가락이 부드러워지고, 몸에서는 뻣뻣함이 사라지고, 얼굴에 활기가 돌며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나는 트럼펫 연주자에게 윙크까지 하고, 그도 나에게 윙크로 화답한다! 나는 경이로울 만큼 행복하다. 내가 있는 곳은 수용소가 아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연주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다.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다른 연주자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흥에 젖기 위해 연주한다. 나는 내 부모의 집을 나왔다. 정말로 나왔다. p. 312






자유를 억압당해 온 아이는 바깥세상을 동경했지만, 그녀 자신의 삶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살다가 마주한 세상은 어땠을까요... (나중에 그녀는 PTSD를 심하게 겪게 됩니다.)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신념을 갖는 게 가장 위험하다는 말이 있죠. 이 글의 아버지가 참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또 많은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신념을 가진 부모가 될 것인가?’ 하고 말이죠. 아이에게 주어진 ‘엄마’라는 우주... 그 우주인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모양일까? 아이에게 어떤 느낌일까? 제가 선택한 것은 (아 지금 육아 지침을 공유하자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이들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주는 것, 그리고 일상에서의 독립성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담화님이 말씀하신 그 ‘가상의 고통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꽤나 고문하는 이야기를 버틸 수 있는 힘은 현실의 정서적 기반의 견고함에서 옵니다. ’라는 문장은 저를 푹 찔러 옵니다.


저는 이 책을 절대 한 호흡에 읽어 내릴 수 없었거든요. 한 시즌이 50화 정도는 너끈히 되는 중국드라마에서 느껴지는 클리쉐 범벅의 고구마는 이겨낼 수 있지만, 이 책은 정말 글줄을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서 아주 여러 번 책장을 덮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켜야만 했답니다.


그리고 그 ‘현실의 정서적 기반의 견고함’이라는 것에 대해서 오늘 좀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나는 아이에게 이 견고함이 잘 자라도록 도와주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오늘 왜 자꾸 육아로 흐르지요?)




담화님께서 그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신나는 모험 이야기나 귀여운 트롤이 나오는 이야기를 읽으셨다면 오늘 우리는 신나고 즐거운 책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까요? 문득 궁금해지는군요.

우리 다음에는 부디 조금 더 신나는 책으로 만나보아요~



필화 보냄.







혹시나 이 책이 궁금하여 구매하시고 싶은 분들을 위해 알라딘 온라인 서점의 구매 링크를 걸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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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P》

《완벽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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