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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화 Dec 25. 2023

책을 읽듯 읽음으로써...

《책을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들》


안녕하셨냐고 먼저 물어야 마땅하겠지만요, 필화 님.

그리고 이렇게 두 달 만에 이곳에서 이렇게 만나뵈어 반갑다고 두 손 마주 잡아야 그림이 나오겠지만요, 저는 지금 사실 땅을 치고 울고 싶어요. 왜인지는 필화 님이 더 잘 아시리라  ヽ(*。>Д<)o゜...




같은 글을 고치고 벗겨내고 다시 덧칠하는 일련의 작업을 반복한 지금, 저의 정신 상태를 한 폭의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단연코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입니다.

출처: www.singulart.com (상세링크는 글 하단에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1948년 작품인 No. 5를 백그라운드로 깔고 읽어 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어요. 백그라운드 이미지도 제시한 마당에 에릭 사티의 벡사시옹vexation도 깔고 갈까 잠시 고민했습니다만 넣어두기로 하죠. ㅋㅋ 농담입니다. 불안해하지 마thㅔ요. 걱정도 하지 마세요.




사실 기획을 여러 번 뒤엎은 건 뜻밖에도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어요. 그거 우리 회사 다니면서 무쟈게 해 본 거잖아요. 갈엎도 어디 한두 번 해봤나요. 전 45만 자 분량의 원고도 버려 본 사람이에요. 기획 엎는 거 따위야 뭐 일도 아닌 거죠. 자연스러운 삶의 한 장면인걸요. 그냥 눈을 염전으로 만들고 있을 뿐인 거지...

그저 우리의 스타일을 확립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 스타일이 뭐냐면... 음, 형식에 얽매이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는 거죠. 하하하하하


아무튼, 그래서 아무런 안내도 없이 내던져진 백지의 광야에서! 광활한 텅 빈 새 파일을 이제 막 연 지금의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의지할 만한 것은 배경에 깔아둔 잭슨 폴록과 에릭 사티밖에 없군요?




아, 책을 고르기 위한 길잡이가 하나 있긴 했군요.

그러나 그 표지판은 이번 시즌 우리의 고정 인사말이기도 하니 편지 말미에서 공개하도록 하죠.




크리스마스를 키워드로 길거리의 행인들에게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어떤 답변들을 들을 수 있을지 갑자기 궁금합니다. 역시 책 이야기가 나오면 다들 손사래를 치시려나요. 크리스마스를 모티브로 삼은 책들,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 캐럴이나 호두까기 인형 같은 책은 고전적인 선택이 될 테고, 코니 윌리스의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같은 크리스마스 단편집은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온갖 장르의 단편이 혼재되어 있어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합니다. 자, 그럼 저는 무슨 책을 보여드릴 것 같으신가요.



피터 멘델선드라는 분이 있습니다.

피아노도 치시면서, 책 표지 디자이너로 눈부신 경력을 자랑하시는 분이시죠. 이분이 디자인한 표지 중에서는 우리에게도 꽤 널리 알려진 것도 있어요. 대표적으로 [밀레니엄] 시리즈가 있죠. 네, 거대한 시리즈를 쓰다 말고 요절하셔서 독자들을 ‘......’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시리즈요. 물론 원작자의 사후에 다비드 라게르크란츠(세상에 저는 원작자 이름은 잊어버리고 이분 이름만 기억하고 있네요)가 이후 시리즈를 이어 쓰긴 했습니다만, 뭐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고 하더군요(저는 중간에 탈주해서 그 아쉬움을 모릅니다).



이분이 쓰신 책 중에 《책을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들》이라는 엄청나게 흥미진진한 책을 보여 드릴까 합니다. 네, 정말 재미있어요. 문자 그대로 독서라는 것이 무엇인지, 독자가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 무엇을 겪게 되는지를 낱낱이 파헤쳐 놓은 책이에요. 두께에 비해서 뭐랄까, 낙서처럼 쓰인 부분도 있고 도판도 상당히 많아서 아주 술술 읽을 수 있어요.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한다.


“‘그럼, 물론이고말고. 내일 날씨가 좋다면 말이야‘하고 램지 부인이 말했다.”


이 말이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램지 부인은 누굴까? 어디에 있을까? 램지 부인은 지금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얼굴 없는 사람 둘이 텅 빈 공간 속에 있다. -방금 첫 삽을 꽂은, 아직 짜이지 않은 공간 속에.


책을 읽어나가면서 램지 부인은 조각조각 오려 붙인 콜라주가 된다. 램지 부인의 아들인 제임스가 소설 속에서 한 것처럼. -p.68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가 인용된 문구입니다.)




낱말 하나라도 지니는 맥락이 중요하다. 낱말은 그 낱말을 에워싸고 있는 낱말들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이렇게 보면 낱말은 음표와 비슷하다. 음 하나를 떠올려보자.

그런데 다른 음을 덧붙이면 처음과 비교해서 어떤 맥락이 생긴다. 화음을 넣을 의도는 아니었더라도 화음이 들린다. 여기에 음을 하나 더 덧붙이면 의미는 훨씬 더 또렷해진다. 맥락이 분위기를 완전히 바꾼다. 글도 마찬가지다.

맥락은- 단지 말뜻을 찾는 맥락이 아니라 이야기를 잇는 맥락은 –독자가 글을 깊이 읽을수록 차곡차곡 쌓여간다. -p.109




우리는 책을 읽듯 읽음으로써, 형용구를 붙여줌으로써, 은유와 제유와 환유를 씀으로써 우리 자신과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파편을 인식한다. 세상에서 가장 깊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그렇게 한다. 흩어져 있는 조각과 대체물로 사랑하는 사람을 읽는다.

우리에게 세계는 여전히 쓰이고 있는 작품이다. -p.418





첫 장을 넘기고 첫 번째 문장이 눈에 스르륵 흘러들어오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렇게 상세하고 문학 해부적으로 뜯어 설명하는 책이 흔치는 않거든요. 독서라는 것이 무엇인지, 책을 읽는 동안 우리의 시지각에, 뇌에, 감정에 일어나는 일들을 이렇게 낱낱이 뜯어 해설한 책이 뭐가 그리 재미있을까 싶은데 재미있습니다. 이왕 시즌 2까지 따라와주신 거 한 번 더 믿어 보시죠!


아까도 한 말이지만 도판도 많고 작가 본인의 손 낙서도 심심찮게 들어있어서 읽는 잔재미가 있어요. 형식만 보면 마치 일기장 같지만, 그 한줌의 텍스트 안에 든 통찰력은 정말이지 물개 박수감입니다.



자, 여기까지가 저의 지난주 독서였습니다.

이제 필화 님 차례예요.

필화 님, “지난 주에 뭐 읽었어”요?









그림 출처: https://bit.ly/3v4ML9p




음악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sKKxt4Kac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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