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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화 Dec 28. 2023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을 의식할 때

<자기 역사를 쓴다는 것>

담화님

오늘은 안녕하실까요?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생이란 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하루하루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면서 맞닥뜨린 문제를 순간순간의 기지로 잘 헤쳐나가다 보면 어느새 저 앞에 가 있는 거겠지요. 그런 겁니다. 그러니 너무 상심 마시고 우선 강추위로 무장하고 다가온 이 겨울을 잘 지나가 보아요.



말씀해 주신 잭슨 폴록의 그림은 예상했는데, 에릭 사티의 벡사시옹은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유튜브의 힘을 빌렸는데, 음.. 그 곡조는 마치 한강변에 양복 입고 출근한 척 서 있는 명예퇴직한 아저씨의 한숨 같달까요... 아무튼 힘들어서 금방 껐습니다. 대신 오늘은 예상치 못하게 눈이 오니까 BGM으로 SNOW Jazz를 틀어두었습니다.



지난주에 담화님이 읽으신  《책을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들》이라는 책의 리뷰 잘 보았습니다. 정말 내용이 좋은데 저는 램지 부인이라는 말에 너무 꽂혔는지, 고든 램지가 생각나서 말이죠. “그럼 물론이고 말고. 내일 날씨가 좋다면 말이야. 고든램지버거에 햄버거를 먹으러 가야겠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씀을 매우 조심스럽게 전해드립니다.


 

물론 우리는 책을 읽듯 읽음으로써, 형용구를 붙여줌으로써, 은유와 제유와 환유를 씀으로써 우리 자신과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파편을 인식한다. 세상에서 가장 깊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그렇게 한다. 흩어져 있는 조각과 대체물로 사랑하는 사람을 읽는다. 우리에게 세계는 여전히 쓰이고 있는 작품이다. -p.418 라는 문장은 정말 좋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지난주에 말이죠. 다치바나 다카시의 《자기 역사를 쓴다는 것》이라는 책을 읽었거든요. 아 그 전 주인가;;; 지난주에 도서관에 반납하였으니 지난주에 읽은 책으로 해두겠습니다. 요즘 도서 리뷰를 잘 안(못) 쓰다 보니 언제 읽었는지 날짜가 정확하지 않네요.




아무튼 이 책은 다치바나 다카시가 릿쿄 대학에서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던 일종의 수업 내용을 정리한 게 주 내용입니다. 핵심은 이겁니다. 개인의 일생을 역사 속에 대입하여 기록해 봄으로써 개인의 역사를 만들어 본다는 거죠. 물론 시간이 많이 흐르면 이 것은 역사의 일부가 됩니다.


 

전후 일본 세대들이 수강생이었지만, 학생 중 한 명은 전쟁 시대를 살았던 어머니의 기록까지 가지고 와서 함께 남겨두었더군요. 그러니 한창 전쟁 중이었던 시절의 내용도 알 수가 있었어요. 워낙 오래전 일이라 역사적 사실만 알고 있던 저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인이 가졌던 1945년의 일에 대해 쓴 감정을 읽고 솔직히 매우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록의 힘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지요. 이런 기록을 읽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테니까요.



기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음.. 쉽게 말해서 두 개의 축이 있습니다. X축은 시간이죠. 자신이 태어나기 전 혹은 태어났을 때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을 기록합니다. Y축에는 여러 레이어를 둘 수 있어요. 시대적 배경을 담당하는 역사적 사건 레이어는 개인의 기록이 역사가 될 수 있도록 해주는 주춧돌이 되는데, 예를 들어 전쟁이나, 대통령이 바뀌었거나 하는 큰 사건들이 있죠.  


또, 개인적 사건 레이어는 초등학교 입학부터 고등학교 또는 대학까지의 입학과 졸업 등이 있을 수 있고, 또 취업, 이직, 결혼, 출산 등의 항목들로 채워지겠죠.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 또 다른 주제의 Y축의 레이어가 추가될 수 있는데, 이 것이 그 개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이슈, 혹은 관심사가 아닐까 싶어요. 직장에서의 성공과 실패 그래프를 그린 사람도 있었고, 자기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에 대한 레이어를 만든 사람도 있었어요.

 

한 개인의 역사들이 계속해서 사례로 나오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가 있었는데, 두 가지 예만 들어볼게요.



앞으로의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을 의식할 나이이다. 이 유한한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적어도 죽을 때 “그것을 했어야 하는데”라는 후회만은 남기고 싶지 않다. 그래서 크고 작은 것들을 모아서 하고 싶은 것을 리스트로 만들어 보았다. 이것이 나의 ‘미래의 자기 역사’이다.


그리고 이 분은 향후 5년씩 기간을 묶어서 하고 싶은 일들을 기록해 두었어요. 일반적인 버킷리스트와 달리 뒤로 갈수록 신체적 한계를 감안한 활동들로 채워지는데, 상당히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내용들이더군요. 예를 들어 70대에는 ‘손자손녀 돌보기와 자원봉사’, 80대로 넘어가면 ‘아파도 연명치료는 하지 않을 것’, ‘장례식은 지인들에게만 통보’와 같은 내용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어서 저에게도 미래를 다시 생각해보게 해 주었습니다.



‘인생’이라는 끝이 없는 달리기의 경우, 상위집단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상위 집단에 속하겠다는 자기 갈망을 어느 지점에서는 버리고, 원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인생으로 갈아타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이기는 쪽, 지는 쪽’이라는 분류법은 완전히 잘못된 분류이다. “사회적 성공에 있어 승리그룹, 패배그룹’과 ‘인생의 승리 그룹, 패배그룹’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물론 사실 종종 상반되기도 한다. (중략) 인생에서 진행되는 게임은 동시에 병행되기 때문에 하나의 게임에서 지더라도 다른 게임에서 이길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있다. …(중략) 또 하나 올바른 전략은 이기고 지는 것으로 모든 일이 결정된다고 믿는 사람들의 인생 게임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는 일이다. p.306



이 내용은 인생의 전반전을 회고하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이제 막 날개를 펼치려고 하는 이십 대 젊은 친구들에게도 메시지를 줄 수 있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생을 꽤 살아보신 분의 말씀이니까요.




그리고 책을 덮을 무렵에야 생각난 책이 두 권 있었습니다.

미셀 오바마의 《Becoming》라는 책과 J.D. 밴스라는 분이 쓴 힐빌리의 노래》입니다.

이 두 권의 책은 미국에서 대단히 히트를 친 책인데, 두 권 모두 저자들 성장기 시절의 미국의 역사, 그리고 거주지의 역사와 더불어 시대적, 교육적 배경을 함께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것을 거창한 정치적 서사가 아니라 매일 고군분투하던 저자들의 소소한 일상의 서사로 내려앉혀 매우 솔직하고 담담하게 적어 내려 갔죠.

(이 책들을 생각하면 어쩐지 Muddy Waters의 Mannish BoyLouis Amstrong의 What a wonderful world 두 곡이 잔잔히 떠오릅니다. 링크 걸어둘께요.)


그러니 저처럼 미국역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그 시대적 배경을 공부하는 기분으로 저자들의 녹록지 않은 하루하루의 고충을 간접체험하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얄팍하게나마 그 저자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들여보게 되는 기분이 들었달까요.



예를 들어, 미셀 오바마가 어린 시절에 ‘흑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의 공공교육의 수준’이 어떠했는지, 변호사임에도 남편을 지지하느라 자신의 일을 양껏 해나가지 못했던 심정이 어떠했는지.. 도무지 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부분을 이해하게 되었죠. 또한 퇴락해 가는 지역에 사는 힐빌리(백인 중하층을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들의 삶과 의식 또한 생경한 세계였습니다만, 이 또한 ‘이런 세계가 있구나…’라고 배우면서 미국의 정치권에 대해서도 아~주 약간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지요.



이제와 돌이켜보니, 이 모든 과정이 마치 보내주신 인용구처럼 역사가 '흩어져 있는 조각과 대체물’이 되어 그 사람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준 것 같습니다.



대체로 자서전은 저자가 역경을 딛고 이겨낸 성장사에 집중하기 마련인데, 이 책들은 다른 접근 방법을 보여준 것 같아서 꽤 인상이 깊었습니다. 또 저의 삶도 그렇게 기록을 해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담화님

우리는 아직 자서전을 쓸 나이는 아니고 자서전에 채워 넣을 일화(?)들을 만들어가는 시기겠지요? 하지만 언젠가 한 번 ‘이제는 좀 내 생을 정리해 봐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에 함께 앉아 Y축의 레이어를 만들어보아요. 우리 개인의 기록이 언젠가는 역사로 남는 날이 오려나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부디 오늘도 따뜻한 저녁밥과 따뜻한 잠자리로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필화 보냄.


Merry Christmas~!

부슈 드 노엘 드셨을까요? 아 맞다. "그래서, 지난주에 뭐 읽으셨어요?"




Muddy Waters_Mannish Boy

Louis Amstrong의 What a wonderfu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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