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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의 의미
진영언니에게
by
주혜
Jan 07. 2025
진영언니에게
언니.
지난주 목요일 병원 다녀오고 나서부터는 계속 맘이 안 잡혀요.
매일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겠다고 그것에만 집중하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근데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거든요.ㅎ
일을 산발적으로 마구 만들어놓고 하나씩 해치울 때의 그 만족스러운 성취감을 참 즐겼었는데.
이젠 참 아득하게 느껴져요.
개인의 성격이나 취향에 따라서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다른 것 같은데.
저에겐 어떤 것이 가장 특효인지 아직 찾아내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가장 좋은 거라지만 달라지는 현실의 무게 앞에선 자꾸 짓눌리기만 하는 것 같아서 때때로 우울해지는 요즘이에요.
어제 새벽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다 3시가 넘어서야 잠에 들었나 봐요.
그럼 그 시간까지 뭘 했냐.
그냥 멍하니 생각했어요.
끝도 없는 생각.
생각.
생각.
뿌연 안개 같은 길에 이정표하나 없이 조심스레 발을 내딛는 심정으로 그렇게 미래를 그리고 있어요.
언제나 명확하고 선명한 걸 좋아하는 저였어서, 그래서 요즘 더 불안해지나 봐요.
조금 늦게 일어나서 설거지를 하면서 아침에 따뜻한 국이 먹고 싶어서 콩나물 국을 끓였어요.
신선한 야채를 많이 먹어야 하니 상추랑 알배추도 깨끗하게 씻어놓고, 냉동실에 5~6알만 남아 뒹굴거리고 있는 동그랑땡도 꺼내서 구웠어요.
가공식품이라 지금 제 몸에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몇 개는 괜찮겠지 하며, 맛있게 먹을 생각으로 준비하고 아침을 먹고 있었어요.
아침을 먹다 또 멍하게 생각이 이어지는데, 가끔씩 암으로 인해 달라진 나의 풍경이 확 와닿을 때가 있는데, 갑자기 그 순간에 또 암의 존재가 선명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암은 밤에도, 지금 이 식탁에도, 내 머릿속에도, 내 삶의 패턴에도 정말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존재로 내 삶을 집어삼키고 있구나 싶은 생각.
그러다 또 생각을 차단시켜야지 싶어 핸드폰을 집어드는데 우체국택배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뜨는 거예요.
따로 택배를 시킨 게 없지만 요즘 제 상황이 이래서 가끔씩 지인들이 선물을 보내줘서 또 누가 선물을 보냈나 했어요. ‘뭐지?’하며 숟가락을 내려놓고 바로 현관 앞에 가 봤어요.
이진영이란 이름이 보이더라고요.
며칠 전에 맛있는 망고도 보내줘 놓고 또 뭘 보냈을까 하며 박스를 열어봤어요.
혹시나 깨질까
포장재로
돌돌돌돌 말아 정성스럽게 포장된 유리병 속에 뭔가가 들어있고 작은 편지봉투가 보였어요.
언니,
저 알잖아요. 제가 뭔가에 크게 감동받고 하는 사람이 아니란 거.
저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 주변에 좋은 사람도 많은 것 같다고 늘 생각하며 사는 편인데요.
수시로 오는 안부들과 선물들, 다들 걱정해 주고 함께 나누려 하는 것들이 참 고마워요.
근데 그 와중에 넘치는 호의와 관심에 배가 불러서 그런 건지, T라 그런 건지 그냥 잠시 고맙고 나중에 나도 뭔가 보답해야지 하고 기억 속에 저장시켜 놓고는 넘겨버리거든요.
아마 언니도 알 거예요.
제 스타일.
제게 잘해주려는 마음이. 온전한 사랑과 나눔의 마음일 수도 있고, 일종의 마음의 채무감일 수도 있고,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일단 제게 보내준 마음은 다 감사하긴 하지만 전 하나하나 깊이 헤아리고 너무 감동에 젖어있고 그런 스타일이 아니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 암진단이 있을 때 이어지던 연락과 선물들이 6개월이 지난 지금은 거의 없어진 것도 사실이고요.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 드문드문 보이는 제 모습이 생각 외로 잘 버티고 있는 듯하고 잘 지내는 듯 보여서 연락하고 물어보기가 조심스러운 것도 알지만 현격하게 줄어든 연락들에 ‘원래 그렇지 뭐~’하며 넘기고 있어요.
어떤 면에선 오히려 지금이 편한 부분도 있고요.
과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과 수시로 오는 연락에 일일이 위로하고 괜찮다 응대하는 게 피곤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으니까.
근데요 언니,
이런 제가 언니가 보내준 자몽청을 들고 서서 눈물, 콧물 쏟으며 한참을 울었는지 몰라요.
머릿속엔 ‘이 언니 요리 진짜 못하는데…’ 하면서 ㅎㅎㅎ
1월 1일 날 만들었다며 작은 편지지에 접어 놓은 마음들도 너무 고맙고 무엇보다 서툰 손길로 정성으로 만든 자몽청이 제가 그동안 알고 있던 ‘선물’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 같아요.
오늘 야간근무라서 집에 있던 남편도 제가 우는 걸 보고 많이 놀랐나 봐요.
그러고는 진영언니가 또 보내줬어 했더니, 눈물 닦으라고 손수건 건네주며 옆에서
“진짜 좋은 사람이다, 진짜 좋은 사람이네.”만 연신 내뱉고 있더라고요 ㅎㅎ
언니.
지난주 목요일 병원에서 진료교수님의 말이 아직도 귀에 청정히 울리는 느낌이에요.
“어차피 완치는 힘들어요.”
의사 선생님이 이제 한 달에 한 번만 와서 면역항암제만 맞으라고 하더라고요.
두 번의 CT결과, 암크기가 크게 줄었고, 좋은 결과로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이 중요한 시기에 잘하고 있던 항암치료를 이렇게 미온적으로 해도 되나 싶고, 근데 왜 이러는 거지 싶어서 교수님께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저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어차피 완치는 힘들어요.”
그래서 바로 따져 물었어요.
“그럼 저는 어차피 몸 상태는 계속 안 좋아지고 상황이 악화될 거라는 걸 전제로 연명치료만 하다 가야 하는 건가요?”
놀라고 답답한 마음에 아마 처음으로 교수님께 조금은 공격적으로 물었던 것 같아요.
그랬더니 말을 많이 아끼시고는, 독한 항암제로 몸에 좋은 세포들도 많이 없어진 상태라 당분간 명역항암제만 투여하면서 경과를 좀 지켜보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2주 후에 잡혀있던 CT를 앞당겨 찍고 가라 해서 찍고 왔어요.
여기저기 찾아보니 원래 항암 8차(총 16회 항암) 이후엔 이런 선택들이 통상적인 것 같더라고요.
처음엔 울컥하고 화가 나더니, 어차피 첫 진단받을 때 6개월도 얘기했었고, 황달도 곧 올 거라 얘기했었는데 지금까지 잘 버티고 씩씩하게 생활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그래야지 마음먹으면서도 이제 크게 믿었던 손을 하나 놓친 느낌이라 좀 더 아득하고 허망한 것 같아요.
그래, 이 암이 그렇게 끈질기고 쉽지 않은 거 아는데…
그래도 나는 다시 마음 제정 비해서 다시 굳게 마음먹어야지 하는 와중에…
제가 언니의 이 귀한 ‘선물’을 받게 된 거죠.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왜 며칠 전에 보낸 그 망고와 이 자몽청은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요.
언니,
전 ‘정성’과 ‘진심’ 이란 것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인지 몰랐어요.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낼 수 있는 원료로써도 이만한 게 없구나 새삼 느꼈어요.
요 며칠 정신없을 언니의 개인적인 상황을 알고 있어서 그 와중에 이걸 따로 챙겨 보내준 것도 그렇고 모든 것들이 지금 제게 무엇보다 크고 힘센 위로와 격려로 다가와요.
그리고 언니의 그 꾸준함과 세심함에 다시 한번 탄복하며, 저 언니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마음먹은 거 있죠 ㅎ
고맙다는 싱거운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제 삶에 이렇게 귀한 인연으로 함께 해줘서 너무 감사해요.
오늘 언니의 따스한 마음이 제겐 오랜 시간 동안 마음에 꺼지지 않는 용기의 불씨가 될 것 같아요.
언니,
잘 먹을게요!
저, 힘낼게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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