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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묘 May 25. 2020

난치병이면 어때

루푸스를 인정하기까지




 루푸스에 걸렸다는 걸 인정하기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하늘이 벌을 내린 거라 생각했다.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나에게만 이렇게 가혹한가 원망의 나날을 보냈다.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아온 거밖에 없는데, 그게 문제라면 '게으르게 살았어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에 내 삶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 나는 누구를 맘 놓고 미워하거나 악의적인 행동을 한적도 없었다. 신기하게도 속으로 누굴 욕하거나 미워하면 꼭 안 좋은 일이 생기곤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생뚱맞은 업무로 인해 야근이 생긴다거나, 양치질을 할 땐 칫솔로 잇몸을 찍고, 길을 걸어가다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등 말이다.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여러 동화의 교훈인 '인과응보'는 삶의 큰 지침이 되었다. 착하게 살면 행복한 일만 다가올 줄 알았는데 루푸스라니. 억울했다. 이런 식의 벌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고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루푸스를 받아들이면 잘 못 살아왔다는 걸 인정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꽤나 흐른 뒤, 깨닫게 되었다. 나는 타인이 아닌 스스로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말이다. 타인을 맞춰주느라 매사 눈치만 보고, 남한텐 한 없이 다정했지만 스스로에게는 가차 없이 냉정했던 바로 내가 문제였다. 직장동료의 한숨 소리에는 그 날 저녁시간을 몽땅 비워 밤새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어도, 정작 내 몸이 힘들다고 보냈던 신호는 무시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니 내 몸은 나한테 화를 낼만 했다.





 




 나는 게으른 걸 싫어한다. 아니. 내가 게을러졌다는 그 느낌 자체를 싫어한다. 어렸을 때부터 시간에 대한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밤에 잠이 들면 내일은 없을 것 같은 두려움. 그래서 늘 불면증에 시달렸고, 하고 싶은 건 그 날 바로 해야 마음이 놓였다. 그렇기에 집 안에서 뒹굴거리며 여유 시간을 보내는 건 극히 드물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고, 휴식의 참 뜻을 몰랐다.







 

 치료과정에 대한 여러 글들을 찾아보던 중, 우연히 루푸스를 앓고 있는 분의 블로그를 방문했었다. 나이는 나보다 어렸고, 루푸스신염으로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나는 그 당시 동정받기 싫어 아픈걸 지인들한테 숨기고 있었을 때였다. 그런데 어린 친구가 스스로 루푸스임을 밝히며, 세세한 내용들을 포스팅하는 걸 읽는데 새삼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직접 이야기하고 싶었다. 용기를 내어 먼저 쪽지를 보냈고, 우리는 며칠 뒤에 바로 만났다.


동생은 내가 사는 곳까지 직접 와주었다. 스테로이드 복용으로 인해 온 몸이 퉁퉁 부어버린 날 위한 배려였다. 아프다는 말들 뿐인 나의 이야기가 지루할 만도 할 텐데, 끝까지 집중해 주는 모습이 고마워 갑자기 울컥하기도 했다.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비관적인 증상들에 동생은 계속해서 희망적인 답변들만 해주었다.


 겁먹을 필요 없다며, 어차피 다 나을 거라고.


그리고 그 당시에 루푸스 관련 카페/단체 메신저 등 다양하게 가입을 해 둔 상태였는데, 동생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기 전까진 중단할 것을 조언했었다. 불안한 심리로 글을 찾게 되면, 안 좋은 글들만 보일 거라며 말이다. 실제로 카페에 들어가면 아픈 증상들과, 아픔으로 인한 대인관계의 문제, 약물 부작용 등과 같이 안 좋은 이야기들 뿐이어서 우울한 감정만 더 커지곤 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안정되었을 때 들어가 보니 '결혼해요, 순산했어요, 약 줄였어요, 증상이 사라졌어요' 등 희망적인 글들만 눈에 보였다.


그 날은 몸상태가 좋지 않아 첫 만남이 길지는 못했지만, 루푸스 확진을 받고 지금까지 약 5년의 시간 동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평소 낯을 많이 가려 누군가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했는데, 아프게 되니까 오히려 용기가 생겼었다.

 그리고 그 용기는 희망을 선물해준 것이다.








 나는 남들에게 주목받으면 얼굴이 빨개지고는 했다. 그래서 대학생활 중 가장 두려워했던 건 발표였다. 나름의 완벽한 PPT와 대본을 준비했어도 빨개질 얼굴 생각에 미리 겁을 먹고 발표를 피할 궁리만 했다. 가뜩이나 학교 자치기구 임원으로 남들 앞에 설자리가 많았던 나에게 홍당무 얼굴은 극심한 스트레스였다.


 

발표를 앞둔 어느 날, 불안한 마음에 피부과를 방문했다. 의사 선생님께 내 상황을 얘기하고, 고칠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다. 대답은 "고칠 수 없다"였다. 피부가 남들보다 얇고, 피부색도 밝은 편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의학적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발표 당일 날. 전략을 바꿔보았다. 홍당무 얼굴을 피하려 하지 않고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먼저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발표 시작 전에 학생들도 다 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로 교수님께 여쭤봤다.  


 "교수님, 저는 발표를 하면 얼굴이 빨개지는데, 이게 혹시 감점 요인이 되나요?"


라고 말이다. 물론 이 질문을 하는 와중에도 얼굴은 눈치 없게 스멀스멀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교수님은 얕게 미소를 지으시더니 대답해주셨다.


 "아니? 그게 왜 감점 요인이야? 발표만 잘하면 되는 거지! 발표에 얼굴색은 아무 상관없어."라고 말이다.


그렇게 시작한 발표. 예상대로 얼굴은 홍당무를 넘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얼굴을 보며 "뭐야, 진짜 엄청 빨개지네!"라며 웃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쩌라고'로 일관했다. 전에는 얼굴을 숨기려 일부러 PPT 화면만 뚫어져라 발표를 했다면, 이번엔 달랐다. 미리 다 밝히고 나니 놀림받을까 봐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 '내가 빨개진다고 했잖아. 봐 내 말이 맞지?' 오히려 더 대담해졌다.       


그 날 발표는 완벽했다. 평소 같았으면 끝까지 달아올랐을 얼굴이 이번엔 초반 몇 분만 잠깐 반응하더니 이내 제 색으로 돌아왔다. 그래서인지 더욱 자신감이 붙었고, 준비했던 마지막 멘트까지 무사히 마치며 발표를 끝냈다. 내가 의학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속이 다 후련했다.







 '인정'이란 단어는 뒤에 이어질 행동에 따라 양면을 가지고 있다. 위와 같은 경우 홍당무 얼굴을 인정하고 발표를 피해버렸다면? 패배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인정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또 남들이 빨개진 얼굴보다 준비한 자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더 완벽한 PPT와 대본을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발표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경험이 있으면서도 단순히 '난치병'이란 말에 겁먹고 바보같이 피하려고만 했던 것이었다.


 루푸스 확진 후, 우울을 절정으로 달리고 있을 때쯤 위의 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난치병이라고 해서 다를 게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한다고 피해지는 건가도 싶었다. 어차피 이미 생겨버린 병. 블로그를 통해 만났던 동생도 초반엔 너무 힘들었다 했지만 이내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줄 만큼 회복했다. 나도 열심히 치료한다면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라며 생각했고,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인정하자. 인정하고, 하루라도 빨리 회복하면 되는 거지! 내가 못할 거 같아? 두고 봐!'라고.


  

 이렇게 마음먹으니 나를 짓누르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던 루푸스도 별 거 아닌 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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