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야 할 것들의 의미
우리 동네는 평범합니다. 주택가라 조용하고 요란스럽지 않아요. 오래된 구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아파트보다는 빌라가 더 많은 동네입니다. 작업실 겸 거주지를 찾아 독립한 공간이기에 더더욱 마음에 들었어요. 조용해서 작업하기 좋겠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입주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신축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알게 되었어요. 아, 이 동네는 지금 재개발이 한창이구나.
특히 '그곳'은 동네에서 가장 초라한 곳이었어요. 폐허만 즐비한 공간이었거든요. 부서진 담벼락마다 '재개발', '철거' 따위의 빨간 글자가 적혀 있어 낮에 보기에도 꽤 을씨년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 동네에 몇 년을 살면서도 단 한 번을 가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참 이상하죠? 가장 초라하고 볼품없는 곳인데 재개발 속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느렸습니다. 몇 년 동안 수 채의 건물이 지어졌지만 그곳만은 꿋꿋이 자기 집을 지키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삼릉 포차'에서 한 잔 하고 집에 오는데 문득 궁금하더라고요. 왜 우리 동네엔 '삼릉(三菱)'이라는 이름을 단 간판이 많은 걸까? 삼릉 슈퍼, 삼릉 숯불갈비, 삼릉 약국, 삼릉 포차……. 어쩐지 그날따라 동네 어원이 궁금해 그 자리에서 냅다 검색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꽤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어요. 삼릉은 전범 기업 미쓰비시의 한자 발음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우리 동네는 일제강점기 미쓰비시 공장 노동자들의 숙소(일명 '줄사택')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삼릉'이라는 마을 별칭을 사용했던 것이지요. 그제야 익숙했던 마을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어요. 왜 그 초라한 집들이 한참이나 '재개발' 딱지를 붙이고도 건재할 수 있었는지. 왜 동네 공원에 강제 징용 노동자상과 소녀상이 있었는지.
순간, 부끄러웠습니다. 익숙하다 못해 지긋지긋해진 풍경들 너머의 역사에 무관심했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아주 먼 과거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내 옆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에 책임감 비슷한 것을 느꼈던 것 같아요. 나라도 잊지 말아야지. 기억해야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지.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지. 고작 마음뿐인 다짐이지만 이마저도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 수 있을 거라며 스스로 다독여봅니다.
올 2월, '줄사택' 일부는 동네 주민들을 위한 공용 공간으로 탈바꿈했어요. 조만간 부지를 다른 곳으로 완전 이전·복원하고, 이곳엔 공용주차장이 들어설 계획이라고 합니다. 곧 사라진다는 뜻이지요. 조만간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후다닥 동네 마실을 가볼까 해요. 초라하고 볼품없는 그곳의 역사를 한 번 좇아가 보려구요. 그러니 어서, 비가 그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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