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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야 NAYA Dec 16. 2019

그렇게 90년대생이 된다

90년대생이 왔다 : Episode 3


고등학생 시절 나에게 상상 속 대학 선배는 참으로 무서운 존재였다. 드라마에 나오는 선배는 늘 소주를 잔에 넘치게 따라주며 이를 ‘애정’이라 불렀고, 가련한 주인공 후배는 ‘의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쓰디쓴 액체를 받아먹었다. 즐겨 보던 만화에서는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년 전체에 기합을 내리는 장면이 종종 그려졌고, 실제로 매년 뉴스에는 신입생 환영회에 참여한 학생이 과음으로 숨졌다는 뉴스가 보도되곤 했다. 

     

지금은 자타공인 반박불문 술쟁이가 되어버렸지만, 대학에 갓 입학했을 당시엔 맥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던 나였기에 ‘아싸(=아웃사이더 =외톨이)’가 될까 두려워 억지로 참여한 신입생 환영회 전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늑대 우리에 내던져진 양이 된 기분으로 참석한 새터(=새내기 새로 배움터)에서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밀림의 왕이 되어 3일간 군림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참여한 신입생 환영회는 아직 고딩 티를 벗지 못한 새끼 양들에게 사자탈을 씌워 ‘우쭈쭈우쭈쭈’ 하는 활동을 2박 3일간 반복했는데, 당시에는 그저 겁먹은 새내기들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성격 좋은 선배들의 배려라고 생각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이러한 ‘우쭈쭈’의 향연이 단순한 어르고 달래기가 아니었음을 깨달았지만.      



학교마다, 그리고 단과대마다 신입생을 맞이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겠지만, 요즘은 신입생 환영회를 ‘새내기 새로 배움터’의 약자인 ‘새터’로 지칭하며 2박 3일간 여정을 떠나는 학교가 대부분이다. 신입생들의 배움터라는 그 이름값에 걸맞게, 먹고 마시며 노는 MT보다는 일종의 워크샵 개념에 가까운 경우가 많은 것이다.    

  

우리 단과대의 경우, 모든 입시 요강이 거의 마무리되는 매년 2월에 새터를 떠난다. 몇천여 명의 새내기와 재학생이 소화해내는 대-장정이니만큼, 까다롭고 섬세한 계획과 자치규약은 필수적이다. 새터를 구성하는 주체는 보통 2학년이 되는 (아직) 1학년인 학생들인데, 그야말로 방학을 전부 ‘갈아 넣어’ 안전하고 평등하고 즐거운 새터를 만들기 위해 애쓰곤 한다.      


‘대학생들이 만드는 규칙이 뭐 얼마나 대단하겠어?’라고 생각하신다면, 아주 경기도 오산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겠다. 재학생과 새내기가 서로를 칭하는 호칭부터 엄격하게 통제되는데, 우선 상호 존대는 필수! 1년을 함께 뒹굴며 생활한 동기들끼리도 예외 없이 꼬박꼬박 서로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며 존중하는 분위기를 형성한다. 신입생은 재학생에게 선배라는 호칭을 사용하되 (‘님’자가 붙으면 너무 강한 위계질서를 느낄 수 있다는 이유로) 선배님이라는 말은 정중하게 금지되고, 선배는 후배를 ‘길동친구’와 같은 식으로 부르며 학교에 먼저 입학했다는 것을 무기로 삼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름 뒤에 ‘님’자, ‘씨’자를 붙이듯 ‘친구’를 붙이는 호칭은 처음에는 낯설지만, 한 번 입에 붙으면 벗어날 수 없는 중독성을 지녔다! 다른 학교 친구들을 만나도 00친구~ 라는 표현에 모두 익숙한 것을 볼 때, 아마 많은 단체에서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새터에서는 보통 ‘인권 강의’, ‘성평등 포럼’, ‘소모임 공연’, ‘오락 시간’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지만, 빠질 수 없는 시간은 역시나 - 새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 술자리이다. 그런데 이 술자리가, 또 아주 요상하다고 할 수 있다.      


재학생들은 복잡하고도 고도화된 서비스로 새내기들을 편히 모시기(?)위해 세부 규칙들을 설정하고 공유하는데, 간략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 과의 경우, 2박 3일 중 첫날은 아예 술을 마시지 않는다. 혹시 모를 사고의 위험성을 확연히 줄이기 위함이다. 둘째 날은 본격적인 술자리를 갖는데, 이때 새내기를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의무와 미연의 사고에 대비하겠다는 책임으로 똘똘 뭉쳐 긴장하고 있는 재학생과 드디어 술을 마신다는 설렘으로 가득 찬 신입생의 텐션 차이를 보는 게 또 아주 즐겁다!     


각설하고, 술자리가 시작되면 202호, 203호, 204호로 불리우던 방은 곧 각각의 이름을 지니게 된다. 술 먹는 방, 술 없는 방, 남학생 휴식공간 그리고 여학생 휴식공간과 같은 식이다. 술 먹는 방에서는 엄선된 술 게임(성적이거나 정치적인 요소가 포함되어있는 게임은 철저하게 금지된다)을 하며 즐겁게 술을 마시며 논다. ‘병x샷’ 등의 여음구(?)는 ‘어벙샷’ 등으로 순화되거나 대체되고, 과에 따라 ‘공산당 게임 금지’, ‘FM 금지’, ‘베스킨라빈스 31 금지’ 등의 다양한 룰 안에서 ‘안전게임’을 즐긴다. 술 없는 방에서는 보통 마피아 게임이나 예능에서 유행하는 여러 게임들(a.k.a. 신서유기 게임, 놀토 게임 등)을 진행하곤 한다.     


여튼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들의 첫 번째 술자리는,
가슴 시리도록 치열한 존중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각 방에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술게임에 참여하는 재학생 (일명 도우미)가 합류하여 술이든 물이든 무엇을 마셔도 ‘정말’ 상관이 없다는 것을 솔선수범하여 선보이며, 학생회는 각 방을 끊임없이 순회하며 후배들을 챙기는 것이 바로 요즈음의 신입생 환영회 풍경이다.     


대학에 갓 입학한(혹은 아직 입학도 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는 부모님도, 교수님도, 아이돌도 아닌 ‘선배’라고 생각한다. ‘병x샷’과 같은 표현은 장애인 비하 발언으로 인식될 수 있으며, 지나친 강권은 불편을 초래하고, 아무리 술자리라 한들 누군가에게 귀여운 혹은 섹시한 척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대학 선배의 한 마디는 아이들에게 스펀지같이 스며들고, 앞으로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스무 살이 되고도 한참이나 지나서 아버지와 처음으로 술을 기울였을 때, 나는 어른과 건배를 할 때는 술잔의 위치를 낮춰야 한다거나, 술을 따를 때 손의 위치는 어디에 두는 것이 좋다는 식의 예절을 ‘1도 모르는’ 상태였다. 이런 나를 보며 아버지는 ‘요즘 대학에서는 술 예절도 안 가르치냐’며 허허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물론 대대손손 내려온 술자리 예절 역시 기본이자 상식이지만, 요즘 애들은 그보다 술자리에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할 수많은 언어와 몸짓에 대한 교육을 먼저 받는다. 이것이 바로 요즘 식 대학 술자리 예절 교육이다. 물론 대학 내 술 문화가 완벽하게 평화로워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러한 평등의 질서를 깨트리는 자가 ‘예의 없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서로를 인정하는 풍토 안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한 아이들이 후배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더 나은 존중을 물려주고자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구조이지만, 선배와 술을 마실 때 몸을 돌려야 한다는 예절보다 후배들의 안위를 더욱 걱정하는 문화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은 당연히, 절대, 아니다. 어떠한 과는 급진적인 사상(?) 변화와 정책 변화로 선배들과의 관계가 서먹해졌고, 어떤 과는 용기 있게 조금씩 조금씩 문화를 바꾸며, 각자의 방식대로 서로의 세상을 만들어나갔다.


우리 학교에서 군기가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어느 공대의 19학번 후배가 ‘이번 새터부터는 대작할 때 선배가 건네는 술의 양을 제한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또 하나의 세상이 이렇게 바뀌어 가는구나, 누군가의 세상이 또 이렇게 바뀌어 가는구나, 그저 짐작하고 미소지을 뿐인 것이다.      



얼마 전 고학번 선배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요즘 애들은 다 ‘선비’ 같아서 대학 생활이 재미없어졌다는, 대학이 ‘요지경’이 되었다는 조롱 섞인 불만을 들은 적이 있다. 아쉽게도 ‘요지경’이 되기 이전의 세상을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그 당시의 대학이 얼마나 즐겁고 재미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술과 농담과 눈물과 피로 맺어진 끈끈함을 지금 다시 경험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서로에게 상처는 주지 말자는 지금의 대학이 나의 세상임이 꽤나 만족스럽다. 술을 마실 것인지,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인지, 조용한 공간에서 휴식을 취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지가 주어지는 사회가 나의 시작이었던 만큼, 획일화된 가치의 강요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지에 귀 기울이는 쪽이 훨씬 편하고, 또 당연하게 느껴진다. 이것이 90년대에 태어난 내가 잃지 않아야 할 소중한 가치라면, 나는 오늘도 당연히 당연하지 않은 수많은 당연한 것들에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며, 그렇게, 진정한 90년대생이 되어 간다. 





본 콘텐츠는 90년대에 태어난 개인이 보고 들은 바를 바탕으로 작성하는 글이며,
모든 20대를 대변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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