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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송 Oct 01. 2019

사랑은 기꺼이 오독할 용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꽃」





사랑은 서로의 눈빛을 읽어내는 것에서부터


흔히 사랑에 빠지게 된 사람들을 보며 "눈이 맞았다"고들 한다. 사랑은 100미터 달리기처럼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시작되지 않는다. 놀라우리만치 짧은 찰나의 순간, 정교한 각도로 마주친 시선 끝 그 사람의 동공 너머에 넌지시 일렁이는 무언가. 그 사람의 눈빛이 내게 반드시 해독해내야만 할 암호처럼 다가오는 때가 있다.


망막에 문신처럼 새겨진 그 짧은 순간은 오랜 잔상을 남긴다.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우리는 그 눈빛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고 싶어 진다. 그렇게 그 사람의 눈빛에 담긴 마음을, 그 마음의 원천인 그 사람 자체를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어 질 때 사랑은 시작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이름이 흔한 나는 예쁜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주 끌리고는 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라고 나조차도 생각하지만 처음 사귀었던 남자친구도 이름이 예뻐서 좋아하게 되었고, 이름이 예뻐서 헤어지기 어려웠던 남자친구도 있었다. 그들의 이름을 부를 때면 마치 세상에 유일한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흔한 이름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출생신고를 하며 부여받은 주민등록번호, 여권 등록번호, 수험번호, 학번... 참으로 많은 번호들이 우리의 이름을 대신한다. 동명이인에 대한 혼동을 줄이고 효율적인 행정처리를 위해서라지만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을 단순한 번호로 환원시킨다는 느낌에 살짝 불편한 마음도 든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의 의미


오늘 글의 서두를 장식한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이름을 부른다(呼名)는 건 참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더는 쓰이지 않는 말들은 사라진다. 한자로는 '사어(死語)', 우리말로는 '죽은말'이라고 불리는 말들이 바로 그것이다. 예컨대 산을 부르던 옛말인 '뫼', 천을 부르던 옛말인 '즈믄' 등이 이제는 쓰이지 않아 사라져 버린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름을 부르지 않는 행위가 직접적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지는 않지만 이름이 아니라 다른 부수적인 것들로 기억되는 사람은 결국 내게 아무런 존재론적 의미를 남기지 못했으니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의미부여이고, 결국 그 사람을 내 세계 안으로 편입시키는 존재론적 통합이다. 누군가의 존재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읽어내는 일이다. 




기꺼이 오독할 용기



시 속 화자는 '너'에게 어떤 의미가 되고 싶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잊혀지지 않을 의미로 남고 싶다. 그러나 내가 원한다고 너에게 나의 의미가 새겨지는 것은 아니다. 네가 나와 눈을 맞추고, 여기 우두커니 서있던 나를 찾아내고, 내 이름을 불러주고, 나를 읽어주고, 내 부재를 기억해줄 때에서야 비로소 내가 가진 이야기들이 너에게 가서 의미로 다시 태어난다.


그 사람의 존재가 발하는 빛이, 생이 그려낸 궤적이 내게 말을 건다. 서로를 읽어 내려가며 밑줄을 치기도 하고, 다시 돌아가 보고 싶은 순간에는 책갈피를 끼워두기도 한다. 서로를 기꺼이 이해하고자 터무니없는 오독도 서슴지 않는다. 잘못은 작아지고, 자랑은 한껏 부푼다. 그 여정 속에서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서로의 이야기가 출처를 알 수 없이 뒤섞이기도 한다.


별도 달도 다 너를 위한 거라는 허풍이라도 떨고 싶은 마음으로 철 지난 노래 가사, 괜히 읽지도 않던 시의 한 구절을 빌려본다. 손끝으로 혀끝으로 입술로 눈길로, 무엇 하나 놓치지 않으려 한껏 그 사람을 마시고 맛보고 만지고 담아두던 순간들. 가끔은 울었지만 그래도 자주 웃을 수 있었던 날들.


우리는 사실 한 순간도 닿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기꺼이 오독할 용기를 가졌다.



나도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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