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보전하는 방법으로

by 바람

브런치 독서클럽의 독서챌린지를 신청했다. 30일의 독서기록을 문제없이 할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 시도해 보는 것이 새해를, 새해를 맞이하는 나를 더 의미 있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나 되게 하는 어떤 일쯤으로.


1월 1일의 아침이라고 해서 특별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이전의 습관대로 움직이다 보니 눈을 뜨고 자리를 정돈하고 아침을 챙기고...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의 흐름도 비슷했다. 일상적이면서도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움직임들의 연속. 시간을 마련해서 책을 읽는 일이 쉽지 않았다. 1일과 2일, 이틀이 의미 없이 흘렀다. 머릿속에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꽉 차 있었는데 결국 독서는 하지 못했다.


3일째 되는 1월 3일, 눈을 뜨고 아침 시간을 보내고 집안 청소를 하고... 모든 일을 서둘렀다. 오늘도 놓치면 포기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아니 오늘도 놓치면 무엇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조급증이 일었다. 시간을 마련할 수 없다면, 절차처럼 흐르는 시간을 당겨보자고 생각했고, 기어코 책상에 앉는 시간을 만들었다. 앱을 열고 독서챌린지 시작을 눌렀다.


첫날은 바로 전날까지 어렵게 끝을 보고 있던 책이었다. <내가 버린 도시, 서울>은 수저의 이름으로 불리는 네 개의 동네가 도로 하나를 두고 맞닿아 있는 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똥수저, 흑수저, 은수저, 금수저', 네 동네가 가까이 있다는 것이 과장스럽지만 사실 지금의 서울을 둘러봐도 크게 억지스럽지 않은 설정이다. 가난한 고아 '나'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네 가지 수저 계급들의 일상의 단면들을 보여주는데, 분노보다는 한숨이 먼저 나왔다. 소설은 영원히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현상을 인물들을 통해 다만 보여줄 뿐, 구조적 불합리에 대한 지적도 개선의 의지도 보여주지 않았다.


독서챌린지 두 번째 날은 도서관에서 빌린 <마흔, 우울해서 고전을 샀어>를 읽었다. 마흔의 저자가 현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어려움과 고민, 갈등과 불안을 고전의 힘으로 마음을 돌보며 이겨나가는 이야기다. 나에겐 지나간 시간 마흔이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변주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서글펐다. 바꿔 말하면 나는 나의 마흔을 음미하지 못한 채 날려버린 것 같아서였다.


불안도, 두려움도, 도전과 용기도, 좌절과 실망도 곱씹어 삭이고 잘 소화했으면 지금의 내가 조금은 달라졌을까 하는 아쉬움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을 날리고 지나왔어도 지금 나의 예순도 그 시간과 다를 바 없이 불안하고 두렵고 도전과 용기가 필요하고 좌절과 실망의 연속이라는 사실이 새삼 그 책을 예순의 나로 바꿔 읽게 했다. 다행스럽게도 책에 몰입할 수 있었다면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독서 내용 중, 노자의 <도덕경>에 득도한 선비의 모습을 '도를 보전하려는 자'로 설명했다고 한다. 채워지기를 바라지 않고 새롭게 보이려고도 하지 않으며 억지로 새것을 만들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나의 독서도 일련의 그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채우고 돋보이고 새로워지는 것이 아닌 지금의 나를 그저 지키는 과정으로.


한 시간도 안 되는 독서 중에 자세를 몇 번 바꾼 것 같다. 의식한 것만도 다리가 불편해서, 바닥에 닿는 발가락이 신경 쓰여 괜히 움직여 보기도 했고, 허리를 곧추세우려다 의자를 돌려보기도 했고.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예순의 몸은 계속 신호를 보냈고 나는 그 몸에 즉각 반응했다.


몸의 신호가 사실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길을 걷다 몸이 몸의 균형이 깨진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였다. 중심이 흔들리는 걸음걸이, 보도블록의 튀어나온 부분에 매번 걸리고 넘어질 뻔한 일, 요즘 같은 날씨에는 옷의 비대함을 이기지 못한 둔한 행동까지. 이제는 앉은자리에서도 이렇게 자주 경고를 보낸다는 것이 씁쓸했다.


친정 언니가 선물해 준 영양제를 모두 먹었다. 꽤 많은 양이었는데 무리하지 않고 매일 챙겼더니 어느 날 통이 텅 비었다. 한때 영양제를 서너 개 갖춰 챙긴 적도 있었는데 먹다 안 먹다 반복하다 보니 오래돼서 그냥 버려지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단 하나의 영양제라고 생각하니 의외로 꼼꼼히 챙겨 먹게 되었던 것 같다.


똑 떨어진 영양제가 아쉬워 딸에게 영양제 얘기를 했더니 금방 주문했고 다시 식탁 한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잘은 모르지만 눈에 띄는 효과가 있어서 먹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준 이의 마음을 먹는 것 같다. 언니의 마음을 먹으며 마음이 배부르고 이제는 딸의 마음을 먹고 예순의 남은 허기를 채운다.


마음은 책을 통해서도 지키고 영양제라는 물질을 통해서도 채운다. 그렇게 나의 마음이 잘 지켜진다. 오늘도 세상을 향한 한 걸음이 적당히 건강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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