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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아서 병난 여자 Mar 16. 2022

따뜻한 봄날, 커피에게도 배신당했다


정말 오랜만에 집 ‘밖’이라는 데를 나가봤다. 평소 차 타고 슝~하고 지나다녔던 거리를 걸으니 따뜻한 봄 햇살에 커피가 땡겼다. 커피숍에서 파는 커피가...


간만에 열심히 다이어트 중이라 커피도 마시지 않는 터였지만 오늘은 안되겠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필코 한 잔을 마셔야겠다.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딱 떠오른 것은 토피넛 라떼였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커피가 아니라고 딴죽 걸진 말아주길 바란다. (내가 말하는 커피는 어쨌든 ‘커피숍 음료’를 뜻하는 거니까. 그리고 나는 지금 기분이 조금 별로니까.)


딱 두 번 마셔본 토피넛 라떼의 맛을 뇌는 정확하게 기억해냈다. 고소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살짝 달달한 그 맛. 그래! 오늘의 기분엔 토피넛라떼가 딱이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이디야 매장에 들어가 키오스크로 아무리 토피넛라떼를 찾아도 메뉴에 보이지 않는다. 순간 망설였다. 


직원에게 물어볼까? 말까? 

사람도 없는데 그냥 직접 주문하고 결제할까? 


나는 하지 말라는 걸, 하지 않는 데에, 순종을 뛰어넘어 복종하는 사람이다. 키오스크로 주문하라고 하면 주문해야 했다. 그렇다고 목소리를 높여 ‘토피넛 라떼’가 어딨어요? 라고 물어볼 만큼의 배짱(나에게는 이 정도도 배짱의 수준이다)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나이가 마흔 중반이 훌쩍 넘었어도 여전히 이상한 데서 수줍음을 타는 사람이 나다. 


어느새 오늘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토피넛 라떼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고 빨리, 차선책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뇌의 전부를 지배했다. 왜 그때 하필 이 녀석이 눈에 띄었을까. 아인슈페너. 난 이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다. 얼마 전, 한 단톡방에서 처음으로 이 커피 이름을 봤을 뿐이다. 토피넛 라떼는 없고(못 찾겠고) 늘 흔하게 마시던 커피는 싫고,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은 날이고, 거기에다 팔랑귀를 가진 나는, 겨우 단 한 사람이 맛있다고 했다는 이유로 홀린 듯 화면 속 아인슈페너를  눌렀다. 


따뜻한 커피가 식을 새라, 발걸음을 서둘러 주차된 자동차로 갔다. 시동을 켜자마자 허겁지겁 기대에 차서 한 모금을 들이켰다. 처음에는 ‘으잉?’ 싶었다. ‘뭔가가 잘 안 섞였나?’ 싶어서 한 모금 다시 마셔보았지만 역시나다. 나도 모르게 툭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뭐야, 무슨 커피가 이렇게 닝닝해?” 


꼭 내 인생 같잖아...


따뜻하고 맛있는 커피를 즐길 생각에 잔뜩 들떴던 나는 커피를 거칠게 내려놓고, 차를 출발했다. 한껏 따뜻해진 날씨에, 오랜만에 마시는 커피숍 커피에 들떴던 마음은 금세 가라앉았다. 인생도 그지 같은데 커피에게마저 배신당한 것 같은 느낌에 쓰라렸다. 


요즘 나는 조금 우울했다. 콕 집어 이유를 말할 순 없지만 뭐 하나 이룬 것도 없이 나이만 먹었다는 느낌 때문이라고 할까. 내 인생에 비하면 다른 사람들의 인생은 너무 괜찮아 보여서 자꾸 초라해졌다. 지나친 겸손이라고 네가 뭐 어때서 그러냐는 그 어떤 위로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살면서 늘 무언가를 원하긴 했지만 간절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의 뜨뜻미지근함으로도 어느 정도 살아졌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뭔가를 특별히 했냐면 그것도 아니다. 되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였다. 안된다 싶으면 차선책을 찾으면 되는 거라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걸 모르겠으니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에 눈을 돌렸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이 꼭 나에게 맞지는 않았다. 그럼 나는 또 마치 내 책임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투덜거릴 뿐이다. 


"뭐야. 사는 게 왜 이래" 


그 반복 속에서 어느새 마흔 중반이 넘어버렸다. 이 나이가 한심하고 부끄러운 건, 무엇 하나 뜨겁게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토피넛 라떼를 쉽게 포기해버린 것처럼. 


그러니 나를 배신한 건 커피도 아니고 인생도 아닌, 나다. 


<숲속의 자본주의자>의 저자 박혜윤은 자신이 포기한 것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소설 <미들 마치>를 언급한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20세기 영국 문학 최고의 소설로 선정했다는데, 소설 속 주인공인 ‘도로시아는 거대한 포기를 하고 시시한 선택을 한다’고 한다. 


“도로시아는 젊은 나이에 첫 남편이 죽으며 대규모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이후 남편의 친척과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첫 남편이 내건 상속 조건이 바로 이 남자와 결혼을 하면 상속받은 영지를 일체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하필 그런 조건을 내걸었다니, 아무래도 둘 사이에 이미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나 보다. 어쨌든. 그런데 하필이면 도로시아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영지를 개혁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사회 전체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위대한 꿈을’ 꾸는 사람이었다. 도로시아가 원대한 꿈을 위해 사랑을 포기했다면 이 책은 위인전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  '도로시아는 영지를 포기하고 아내이자 엄마로 평범한 인생을 택한다'


이 결론이 너무나 허탈해서 수많은 독자와 비평가들이 수 세기에 걸쳐 실망을 표할 정도였지만, ‘작가 조지 엘리엇은 이 허탈함이야말로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진실된 이야기라고 주장한다’고 했다. 작가의 그 주장을 담은 마지막 문단을 책은 그대로 옮겨 놓는다. 


“이 세상에 선이 늘어나는 것은 역사에 남지 않을 사소한 많은 행동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더 나쁜 세상에서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은 이유의 절반쯤은, 드러나지 않는 삶을 충실하게 살다가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에서 잠든 이들 덕분이다” 


읽어보지 못한 소설이지만 그 허탈하다는 결말이 자꾸 마음에 남는다. 뭘 그렇게 뭐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냐고 나에게 묻던 질문을 똑같이 던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 원대한 꿈은 아니다. 역사에 남을 행동. 어우 그것까지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내 인생에 뭔가 하나쯤은 이루고 싶을 뿐이다. 그 정도쯤은 가져도 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나의 결론은 이렇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은 뭔가가 되고 싶다. 한 번도 뜨겁게 살아보지 못한 나는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자꾸 뭔가가 되고 싶다. 뭔가가 되어야겠다. 설사 지금은 그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할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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