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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나의 사랑은 늘 거기에

by 김희숙 라라조이


'약 먹고 죽을래도 약 먹을 시간이 없어서 못 죽는다.'


엄마는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그건 죽을 만큼 바빴다는 얘기였을까?


그 당시엔 일하는 엄마들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는데 엄마는 열심히 일하고, 우리를 키우고, 또 극성도 떨면서 살았다. 그러면서 엄마는 내가 태어난 시(사주)가 엄마와 같아서 너도 팔자가 세서 일을 하고 살 팔자라고 말하면서 연민의 뜻을 내비쳤다. 그럴 때마다 난 "절대로 집에 안 있을 거야. 난 내 일을 하며 살 거야"하며 팔자가 세다는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역시 바빴다. 항상 무얼 하느라고 바빴다. 내가 기쁘고 바쁘게 일하면서 사는 동안 엄마는 텅 빈 공간과 시간에 있었다. 자신의 가슴에서 사라진 가족들을 생각하며 오로지 한 명 남아있는 딸에게 집착하며 갑자기 주어진 익숙하지 않은 무료한 시간을 지내고 있었다.


그때 내가 바쁘지 않았어야 했는데. 나는 엄마의 팔자를 닮아서 바빴고 나의 사주에 나와 있는 역마살대로 외국에 가서 지낸 적도 있어서 엄마의 텅 빈 시간은 더욱 공허했을 것이다.


나에게도 바쁜 시절이 점점 할랑해지더니 갑자기 툭, 텅 빈 시간이 주어졌다. 물론 그 안에 벌써 엄청난 스케줄들이 들어찼지만 근본적으로는 바쁠 일이 아니다.


내가 한창 바쁠 때 퇴근하고 돌아와서 화장실에 들어갈 때면 엄마가 보고 싶었던 딸은 화장실 문을 닫지 못하게 했었다. 나는 그 순간마저도 혼자만의 편안한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에 "제발!"하고 애원했었다. 오늘 그 딸이 집에서도 잘 볼 수 없이 바쁘게 지내더니 조금 전에 들어왔다. 방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 있는 딸을 오랜만에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노크하고 문을 살짝 열었더니, "제발!"이라고는 안 했지만 "나 일하는 중인데..."라고 한다. 0.1초 만에 문을 닫는다.


저마다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나의 흘러가는 시간 중에 그의 시간이 스쳐 만나야 한다. 그것이 인연이고 운명인가. 누구는 천천히 가는 시간 위에 있고, 누구는 자신도 정신 못 차릴 정도로 휙휙 지나가는 시간 위에 서 있다. 저마다 서로 다른 속도의 시간 흐름 사이에서 어쩌다 만난 시간에 우리는 방긋 웃어야겠지. 그리고 그 미소를 오래 가슴에 새기면서 엇갈리는 시간들을 지탱해야 하나보다.


엄마는 내가 딸을 낳았을 때, 우리 여자 3대가 태어난 시가 똑같다며 일을 하며 살 팔자라고 했다. 엄마는 일하며 육아와 가정에 소홀하지 않을까 하는 사회의 눈총을 많이 받으며 고군분투했다. 시대가 바뀌며 나는 커리어우먼처럼 당당히 일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늘 가족에 대해 해주지 못한 것들을 마음 아파했다.


사주에 대한 해석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딸은 자신의 분야에서 훨훨 날아다니며 일하고 즐기기를 바란다. 그러나 정신없이 바빠서 지쳐가는 딸을 본다. 아마도 빠르게 흐르는 시간의 궤도에 올라탄 것 같다. 나의 시간과 엇갈리며 다른 속도로 흐르고 있다.


어떤 것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때 내가 화장실 문을 닫지 않은 것은 참 잘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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