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면 같이 도동에 일출을 보러 가자던 게스트는 아직 자고 있는지 기척이 없다. 계속 기척이 없기를 바라본다. 난 깬 것도 아니고 자는 것도 아닌 상태로 헤롱 대며 있다. 6시 7분, 옆 게스트가 나간다. 나가는 소리를 듣고 나서 난 다시 잔다. 며칠 너무 달린 것이다. 버스도 많이 타고, 배도 많이 타고, 또 많이 걸었다.
지극히 몸을 아끼는 건강주의자로서 난 늘 몸의 소리를 듣는다.
여행을 하며 깨닫는 것 중 하나는 몸을 소중히 다루는 것.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 있어도 다리가 아프면 갈 수가 없다. 힘들게 걸어서 갔다 해도 피곤해서 감흥이 없다.
여행은 다리가 떨릴 때가 아니라 심장이 떨릴 때 가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지금 잔다. 떨리는 심장으로 울릉도를 맞이하기 위한다는 미명 아래 쿨쿨 잔다. 성인봉, 죽도, 행남등대 모두 안녕. 오늘은 자고 싶을 때까지 잘 거야. 그러다가 카페에 가서 햇빛도 받고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실 거야.
약 2시간가량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가뿐하고 개운하다. 지금 시간 8시 45분.
아침시간 9시까진데 밥 먹을까?
후다닥 식당에 내려가니 이미 식당은 정리 분위기다.
-안녕하세요. 저 혹시 아침...
-네. 안녕하세요. 해드릴게요~
-저 혹시 달걀 프라이 완숙으로...
-네...
자리에 앉고 보니 일출을 보고 온 긍정 게스트님이 보여 서로 반갑게 인사한다.
-잘 보고 오셨어요?
-네 정말 멋졌어요. 이거 보세요.
흥분된 목소리로 사진을 보여준다.
-깨울까 말까 고민했는데 깨우는 건 아닌 것 같아서 그냥 갔어요.
-네. 잘하셨어요.
게스트하우스 여자 사장님은 우리를 보며 이야기한다.
-저는 이렇게 개인 여행자 손님이 오면 좋더라고요. 단체 관광객보다. 여행자분들끼리 같이 얘기하는 거 듣는 것도 재밌고 부럽고 그래요.
-게스트하우스가 너무 좋아요. 없는 게 없어요. 깨끗하고 편리하고. 어떻게 이렇게 좋을 수가 있어요?
-저도 여행하는 거 좋아해서 예전에 아이들과 많이 다녔었거든요. 그래서 그때 봤던 것들이 많이 도움이 되었나 봐요. 오늘은 어디 가세요?
-오늘 원래 성인봉이랑 죽도랑 행남등대 가려고 했는데요...
갑자기 위드유 남자 사장님이 말한다.
-세 곳을 오늘 다요?
다 못 가요. 하루에 한 군데만 가야 해요.
-그렇죠? 성인봉은 많이 힘들겠죠?
-성인봉은 힘들긴 하죠. 근데 요즘은 성인봉보다 깃대봉도 많이 가요. 깃대봉에서 바라보는 울릉도가 정말 아름답거든요. 깃대봉에서 송곳산 옆으로 내려오면 평리마을이 나와요. 거기에 가수 이장희 씨가 만든 울릉천국이 있어요. 거기서 조금 걸으면 추산마을에 하얗고 멋진 건물이 있어요. 올해 세계적인 디자인상 1 등을 차지한 코스모스 리조트예요. 리조트와 같이 있는 카페울라에서 차 한잔하고 와도 좋죠.
코스모스 리조트가 울릉도 1위 숙소, 그리고 바로 위드유가 2위예요.
-네. 아무렴요.
여자 사장님이 얘기한다.
-그런데 게스트님, 왠지 여행 많이 하는 느낌이 나요. 여행 관련해서 글도 쓸 것 같고...
-정말요? 제가 그런 분위기가 나요? 감사해요! 제가 여행을 좋아하긴 해요. 그래서 여기도 걸었고, 저기도 걸었고... 블라블라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푼수끼가 뛰어논다. 이런 푼수.
칭찬을 받아 기분 좋게 아침을 시작한다.
오늘 일정은 사장님 추천대로 나리분지와 알봉 둘레길 따라 깃대봉 오르기, 울릉천국 가기, 코스모스 리조트 보고 카페울라에서 커피 마시기.
10월 30일 목요일 날씨 맑음. 현재 온도 13도.
해가 있고 바람이 안 부니 13도인데도 따뜻하다. 10시 9분 버스 탑승 완료! 나리분지에 가기 위해서는 저동에서 천부까지 가서, 천부에서 나리분지행 버스를 타면 된다. 10시 30분 천부에 도착했다.
나리분지행 버스시간이 한 30분가량 후다.
30분 동안 뭐하지? 천부 앞 새파란 바다를 보니 괭이갈매기들이 모두 바위에 앉아있다. 가방에서 먹고 남은 새우깡 봉지를 꺼낸다. 하도 눌리고 눌려서 새우깡 길이가 반쪽이 됐다. 새우깡을 바다 쪽으로 높이 들어서 갈매기들을 유혹한다.
얘들아. 여기 봐봐. 너희들이 좋아하는 새우깡이야.
꿈쩍도 안 한다. 몇 번 해도 요지부동이다.
에잇. 내가 다 먹어버릴 테다.
우걱우걱 새우깡을 씹으며 돌아보니 빨간 우체통이 예쁘다. 다른 집도 둘러보니 빨간 우체통. 울릉도 모든 집은 다 빨간 우체통을 가지고 있다. 우체통을 보고 있는데 옆으로 동물이 보인다. 고양이다. 근데 삐쩍 말랐다. 이제껏 만났던 고양이 중 가장. 가방 속에 있는 고양이 간식(마트에서 산 짜 먹는 고등어)을 꺼내 주는데 도망간다. 가지 마. 가더라도 이거 먹고 가. 마른 한치도 있는데...... (대부분 고등어는 안 좋아한다. 다음엔 게맛살로 사봐야겠다.) 길 한쪽에 고등어와 한치를 놓고 고양이가 먹기를 바라본다. 모두 따뜻하고 배부른 지구였음 좋겠다...
핸드폰 알람이 울려보니 배 예약 취소했던 돈이 들어왔다는 소리다. 금액은 61,000 원.
딱 독도 새우 1인분 금액이다. 그래 이건 먹으라는 뜻이야.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10시 30분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에는 나 말고 부부로 보이는 아저씨와 아줌마가 앉아있다.
버스가 오르고 또 올라 나리분지에 도착했다. 기사님 운전실력에 늘 감탄하던 나는 오늘 용기 내 이야기한다.
-기사님 정말 운전 잘하세요!
-아이고 아니에요~라고 하시지만 기사님은 좋아하셨다.
진심을 담은 칭찬이다.
울릉도에서 유일하게 평평한 곳. 나리분지.
딴 세상에 와있는 듯하다. 주위를 둘러싼 멋진 산 봉우리 안에 평평한 마을이 쏙 들어와 있다.
나리분지 이름은 고종 때 울릉도에 들어온 사람들이 섬말나리 뿌리를 먹고살아서 이름 지어졌다. 섬말나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울릉도와 독도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다. 여름이 되면 노란색 예쁜 나리꽃이 피어난다. 나리분지에는 옛 느낌이 물씬 나는 집도 볼 수 있다. 너와로 지붕을 이은 투막집과 너와집이다. 나무껍질로 지붕을 쌓고 억새를 엮어 집을 만들고 흙으로 틈새를 매웠다. 바람이 많이 불고 눈이 많이 오는 울릉도에 딱 필요한 집이다. 투막집은 연중 4℃ 온도를 유지해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마법의 집이다.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깃대봉 쪽으로 향한다. 같이 내린 부부는 너와집만 보고 태하로 가신다고 한다. 안내소에 가서 깃대봉 가는 길을 물어보니 올라가는데 1시간 내려가는데 50분 정도 걸리는데 내려가는 길은 좀 험하다고 한다. 부부는 이야기를 듣더니 나와 같이 깃대봉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우리 셋은 깃대봉을 함께 오르게 되었다.
깃대봉도 식후경.
점심을 먹으러 아까 내렸던 버스정류장 앞 식당으로 내려갔다. 두 분은 산채비빔밥을 난 산채전을 시켰다.
산채전이 먼저 나오고 같이 맛있게.
튀김은 신발을 튀겨도 맛있다더니(설마) 전은 늘 맛있다. 그리고 이어 나온 산채비빔밥. 두 개가 아니라 세 개가 나왔다. 그런데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솔솔 풍기고 초록빛 나물들도 신선해 보여 두 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 그릇으로 셋이 나눠먹자며) 난 그냥 먹기로 했다. 부부는 광주에 사시는데 산을 좋아하셔서 평소에도 무등산, 장흥산, 월출산 등 주말마다 많이 다니신다고 했다. 기분 좋게 밥을 먹고 산채전과 산채비빔밥을 계산하려고 했는데 아저씨께서 이미 계산을 다 하셨다. 고마우면서도 죄송스럽다. 괜히 두 개 시켰네. 배는 든든하고 울릉도는 아름답고 기분 좋게 깃대봉으로 출발. 지금 시간 12시 4분.
아저씨는 나를 보고 성격이 정말 좋아서 직장에서 일을 잘할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덕분에 원래 계획에 없었던 깃대봉을 걷게 되어 고맙다고 하셨다.
칭찬은 독도 새우도 나도 춤추게 한다. 아무것도 묻고 따지지 않고 칭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맛있는 산채전과 산채비빔밥도 고맙습니다.
기분이 좋은세 사람이 즐겁게 깃대봉을 향해 걷는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아름답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사진으로 담을 수 없이 아름답다. 침묵보다 나은 언어가 없고, 두 눈보다 나은 렌즈가 없다. 오색 나뭇잎은 햇빛 받아 빛나고, 걷는 길은 평평하고 푹신하고 정말 아름답고 기분 좋은 산책 길이다. 저 멀리 보이는 하얀 허수아비 부부도 아름답고, 넓게 펼쳐진 식물들도 아름답다. 식물을 자세히 보니 메밀이다. 9월에 하얀 꽃이 피면 장관일 모습이 그려진다.
같이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알고 봤더니 아저씨와 아줌마는 부자셨다. 순천 산에 이미 집을 지으셨다고 했다. 집을 지으면서 고생했던 이야기, 당하셨던 어려움, 피곤함 등을 토로하시며 집을 짓게 되면 얘기하라고 하셨다. 그동안 고생하며 집을 잘 짓는 방법을 터득하셨다고 했다. (아 내 집은 언제 지으려나!)
그리고 아주머니는 내게 수많은 사람들이 으레 궁금해하는 그 질문을 했다. -결혼은 했어요?
안 했다는 내 이야기에 나이는 몇 살인지, 결혼은 왜 안 하는지,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아이는 나야지... 가 이어졌다. 오랜만에 듣는 소리인데 왜인지 내 마음이 고요하고 잔잔하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언제 내성이 생긴 거지?
계속 평지였던 길은 깃대봉으로 올라갈수록 험해진다. 아 오늘 아침만 해도 이렇게 걷고 있을 줄 몰랐는데... 한국 10대 비경으로 뽑힌 태하 해안도로를 가시겠다는 일념 아래 아주머니의 걸음 속도는 어떤 지형이 나타나도 늦춰지지 않는다. 나는 점점 뒤로 뒤쳐진다. 아 그냥 먼저 가시라고 할까? 서서히 속도를 늦춰 돌 위를 오르고 오른다. 먼저 정상에 도착하신 부부는 사진 찍기에 바쁘시다. 깃대봉 정상 1시 33분. (오르막 1시간 30분 소요) 정상에 오르니 사방으로 새파란 울릉도 바다와 아까 지나온 나리분지와 알봉 둘레길이 알록달록 드리워있다. 산에 오르기는 힘들지만 정상에 도착하면 이렇게 확실한 보상이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된다. 힘들게 일했지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상이 없을 때 얼마나 슬프고 화나고 허무하던가? 직장 생활하면서 그럴 때가 얼마나 많던가? 산의 정직한 보상이 더 큰 위로로 다가온다.
이제 하산.
하산이 쉽다는 건 오산. 사실 오르막도 힘들지만 내리막도 힘들다. 이미 에너지를 많이 쓴 상태라 그렇고, 내려올 때 관절에 무리가 더 많이 가서 그렇다. 그래서 내리막길에는 더 조심해서 내려와야 한다. 길이 미끄럽다. 계속 발끝에 힘을 주고 가야 한다. 스틱이 간절히 생각나다. 부러져 있는 나뭇가지를 살펴보며 적당한 것을 찾아 짚고 내려오니 훨씬 낫다. 그래도 길은 계속 미끄럽고 아주머니는 월출산을 타셨던 실력과 태하 해안도로를 가겠다는 목적성을 가지고 휙 내려가신다.
제발 그만 내리막길이면 안 될까? 그냥 편하게 계속 평지면 안 될까? 혹자는 그러면 너무 지루하지 않겠냐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것 같다. 평지라도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그것만으로도 재밌고 편안하고 막 그럴 것 같은데... 왜 산이나 삶이나 이렇게 험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걸까? 사유하며 고민하며 소리치며 내려온다.
멀리서 염소 소리가 들려온다. 드디어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얼룩무늬 염소가 고생했다며 메~~~ 메~~~ 말해준다. 염소 바로 뒤에 보이는 건물이 울릉천국 건물이다. 아 드디어 내리막길 끝. 지금 시간 2시 35분. 나리분지부터 깃대봉까지 오르막길 1시간 30분, 깃대봉에서 울릉천국까지 내리막길 1시간, 총 2시간 30분 걸렸다. 함께 걸은 아저씨와 아주머니와 인사하고 나는 울릉천국 안으로 들어간다.
울릉천국은 가수 이장희 씨가 지은 건물이다. 울릉도 여행으로 울릉도에 반한 이장희 씨는 하와이 대신 울릉도에 살기로 마음먹고 이주했다. 이어서 지은 울릉천국 건물은 3층으로 1층은 공연장, 2층 전시장, 3층 카페로 되어 있다. 넓게 펼쳐진 외부에는 연못, 정자, 의자 등이 있다.
1층으로 들어가니 왼쪽 벽 위에 달린 티브이 브라운관에서 쎄시봉 당시의 이장희 씨 모습과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모습이 방영되고 있다. 동백꽃필무렵에서 나를 흔들었던 용식 씨가 쎄시봉 일원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저 영화를 처음 볼 때만 해도 이럴 줄 몰랐는데... 나의 이상형으로 찜콩.)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우리 잊기로 해요' 등 주옥같은 노래들이 울릉천국에서 흘러나온다. 집에 가서 한번 더 쎄시봉을 봐야겠다.
울릉천국에서 나와 일주도로를 따라 추산마을 쪽으로 1시간 정도 걸었다. 웅장하게 서있는 송곳봉 옆으로 보이는 하얀 건물이 코스모스 리조트인가 보다. 아 근데 리조트로 가는 아스팔트 길 경사가 대단하다. 이 경사를 뚫고 올라갈 만한 건물이라 이거지. 디자인 대상을 탄 건물이라 이거지. 힘들지만 올라가겠어요.
올라가고 있는데 갈색 지렁이가 꿈틀거린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가 아니라 지렁이는 밟기 전에 꿈틀거린다? 혼자 웃는다. 가끔 스스로가 정신 나간 사람 같다. 그래. 밟고 난 다음에 꿈틀거리면 이미 아프잖아. 밟히기 전에 피하든 꿈틀거리든 할 일이다.
코스모스 리조트 그리고 그 옆 카페 울라. 멋있다. 갑자기 나타난 노란 고양이가 막 뛰더니 나보다 먼저 카페 울라로 들어간다. 카페울라에 가서 카페라테와 초코 브라우니를 시켰다. 벽에 붙은 친환경 빨대 사용 문구가 반갑다. 테이블 위에 핸드폰과 보조배터리를 올려놓았는데 보조배터리 충전기 선 위에 곤충이 앉아있다. 언제 들어온 거야? 카키색 조그만 곤충이 충전기 선을 따라 빙빙 돈다. 그 모습이 또 재밌다. 혼자 걷는다고 지렁이도 곤충도 고양이도 친구가 돼준다. 버스 시간에 맞춰 나오면서 곤충을 살살 휴지에 놓고 카페 올라 밖 정원에 내려준다. 곤충과 고양이에게 인사하고 급경사 길을 내려오는데 저 멀리 버스가 보인다. 아 왜 벌써 오지? 내가 탈 버스 맞나? 맞나? 아 맞나 봐! 마구 뛰어간다.
다행히도 기사님이 기다려주셔서 무사 탑승. 생각해보니 버스 시간을 잘못 봐서 하마터면 50분을 기다릴 뻔했다. 기사님 감사합니다. 역시 울릉도 기사님 최고.
숙소에 들어오니 내 침대 위에 편지와 카스텔라가 올려져 있다. 긍정 게스트님이 놓고 간 거였다. 안 그래도 오늘 여행하며 생각났었는데... 같이 독도 새우를 먹고 같이 일출을 보자고 했지만 둘 다 하지 못했다. 독도 새우 2인분에 120,000원이면 1인분만 팔아달라고 해서 먹고, 스쿠버다이빙을 좋아해서 이집트 홍해에서 자격증도 땄다는 긍정 게스트님 고맙고 미안해요. 길 위에서 다시 인연이 되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