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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씨 Jun 04. 2024

그냥

   사이버 대학 과정에 등록해볼까? 사이버 대학 문예 창작 전공 과정을 검색해본다. 각종 문학상 입상과 등단한 재학생 및 졸업생의 사진과 인터뷰가 실린 일종의 광고성 글이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모집 요강을 대충 훑어보다 창을 닫는다.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해볼까? 설치한 지 일주일이 넘었건만 열어보지 않은 듀오링고 애플리케이션으로 시선이 가지만 이번에도 손가락이 가닿지 않는다. 

 습관처럼 지역 도서관 홈페이지에 들렀다. <들뢰즈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마주침과 사유의 이미지>라는 몹시도 거창해 보이는 3개월 과정의 강좌가 집 근처 도서관에서 열린다. 살짝 구미가 당기지만 동네에 똑똑한 사람은 모두 모일 것 같다. 그중에 아는 얼굴이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참여대상에 ‘가벼운 토론을 즐기는 시민’이라고 적혀있다. 마음에 걸리는 지점이 매우 많아 신청하지 않기로 한다. 

  본격적으로 주식 공부를 해볼 작정으로 관련 서적을 대출했으나 반도 읽지 못한 채 반납했다. 얼마나 노동을 할 수 있을지 앞날이 불투명해 전문 투자자로 나서볼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수영과 헬스장은 발을 끊은 지 한 달이 넘었다.      


 사람들은 참 열심히 산다. 골프나 수영, 필라테스, 요가 강좌를 듣고 아파트 헬스장에 꾸준히 간다. 저녁에 동네 산책을 하는 이도 많다. 바쁜 와중에 다들 참 여유롭기도 하다. 

 취미 생활도 다양하게 즐긴다. 피아노를 배우고 문화 센터에서 댄스 강좌를 듣고 커피나 제빵은 이미 한 번쯤 거쳐 간 취미이다.

 영어, 일본어, 스페인어, 중국어를 배우는 사람도 많다.

 여행도 잘 다닌다. 근래, 그러니까 엔화가 약세 이후 일본 여행을 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베트남, 괌 같은 휴양지의 이름도 쉽게 입에 오르내린다. 

 경제 불황에 관한 기사에는 늘 이런 댓글이 달린다. “연휴에 공항이나 스타필드에 가봐라. 대한민국 절대 불황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참, 적극적으로 배우고 즐기며 살아간다. 문화생활도 취미나 운동도 다 열심이다. 

 여기 그러지 못한 사람이 한 명 있다. 남들처럼 열심히는 못 살아도 제 나름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련만, 어째 다른 사람들을 보며 마음이 괴로워 문제다. 

 늘 내일은, 다음 주는, 이번 달은, 올해에는 다를 거라 다짐한다. 동남아든 일본이든 여행도 다녀오고 수영과 산책, 영어 공부를 ‘루틴화’하기로, 학위든 자격증이든 미래를 위한 준비도 게으르지 않으리라.   

   

 그런데 사실 이 모든 게 다 하기 싫다. 다른 삶과 비교하지 않고 나대로 삶을 살아보고 싶다. 

 아무것도 배우고 싶지 않다. 발전적으로 살고 싶지 않다. 열심히 살고 싶지 않다. 그냥 살고 싶다. 그냥. 그냥! 

 “더 이상의 변화 없이 그 상태 그대로, 그런 모양으로 줄곧, 아무런 대가나 조건 또는 의미 따위가 없이.”

 방금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본 ‘그냥’이란 단어의 뜻이다. 나는 어떤 변화도 추구하지 않고 이 상태 이대로, 이런 모양으로 줄곧, 어떤 사건이나 일에도 의미를 찾는 일은 그만두고 ‘그냥’  살고 싶다.


 이 일은 언제까지 할 수 있으려나, 다음엔 무슨 일을 해야 하나, 등등 생각지 않고 ‘그냥’ 그만하는 날까지 빵집에 출근하고 싶다. 

 감독은 무슨 생각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으며 언뜻 보기에 쓸데없는 저 장면과 대사는 왜 넣었을까, 무슨 의미가 담겨있을까. 영화에서 느낀 것을 어떻게 내 삶과 연결할 수 있을까,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고서 ‘그냥’ 영화 보고 싶다. 

 책을 읽을 때도 남들은 뭘 느꼈나, 나는 무얼 느꼈나, 이 책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 인생 이 시점에 이 책을 만난 것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있을까. 등등의 생각 없이 ‘그냥’ 책에 써진 이야기를 읽고 싶다. 

 다가오는 연휴나 주말에는 어떤 ‘의미’ 있는 일정을 채워야 하나, 인스타에 뭐라도 남겨볼까하는 궁리 없이 ‘그냥’ 주말을 보내고 싶다.


 지금부터 그냥 해보기로 한다. 그냥 쓰고 싶어 글을 한 편 썼다. 그 이상 의미는 없다. 이제 무얼 또 ‘그냥’ 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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