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유화를 배워보고 싶었다. 글로 감정을 표현하는 건 익숙했지만,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내 마음을 꺼내 보고 싶었다. 그렇게 가까운 원데이 클래스를 찾아가 서툰 손으로 첫 붓을 들었다.
처음 붓을 잡았을 땐 어색하기만 했다. 내 손인데도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캔버스 위에 그려지는 건 엉성하고 불완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안했다. 음악을 틀어놓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물감이 내 감정을 따라 흘러가는 것 같았다. 글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들이 색과 선으로 번져갔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점점 특별한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캔버스 위에서 나는 나를 마주했다. 단순한 취미를 넘어, 그림은 내 안의 소리를 꺼내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되었다.
작업실 한쪽에 작은 공간을 꾸몄다. 이젤을 세우고, 크기가 다른 캔버스를 준비하며 물감과 붓도 하나둘 늘려갔다. 글이 막힐 땐 붓을 들었다. 그렇게 글과 그림은 서로 이어졌고, 내 창작의 범위도 조금씩 넓어졌다.
어느 날, 내가 그린 그림 하나를 아버지가 벽에 걸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물었다.
“그냥 취미로 그린 건데 왜 걸어놔요?”
아버지는 한참 그림을 보더니 담담히 말했다.
“난 이 그림이 좋아.”
그 말이 묘하게 가슴에 남았다. 내가 무심코 그린 그림이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따뜻했다.
유화는 나에게 기다림을 가르쳐 주었다.
물감을 덧칠하고,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 시간을 견디며 나는 조급함을 내려놓았다.
글이 순간적으로 쏟아지는 작업이라면, 그림은 시간을 쌓아야 완성되는 작업이었다. 두 가지 방식은 달랐지만, 나를 지탱해주는 큰 축이 됐다.
글로는 채울 수 없던 빈자리를 그림이 채워 주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나를 다시 만났다. 그림이 없었다면 알 수 없었을 또 다른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