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방인 — 감정이 사라진 시대의 인간

알베르 카뮈, 진정성의 대가를 묻다

by 신세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자와 느끼지만 사회가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는 자는 어떻게 다를까요? 소설의 배경인 알제의 태양은 잔인할 만큼 밝습니다. 빛이 너무 강해서 모든 게 다 하얗게 번져 보이죠. 그 눈부심 아래에서는 감정의 결조차 증발해 버립니다.


주인공 뫼르소의 어머니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울지 않았습니다. 장례식 다음 날엔 연인을 만났고 사랑을 나눴죠. 얼마 후 해변에서 사소한 다툼 끝에 한 남자를 권총으로 쏘게 됩니다. 하지만 법정은 그의 손에 들린 총보다 그의 눈에서 흐르지 않은 눈물을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재판의 초점은 살인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가 정해놓은 감정의 형식을 어긴 데로 옮겨가죠. 결국 그는 살인자라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괴물’로 낙인찍혀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이게 바로 카뮈가 말한 부조리의 맨얼굴입니다. 세상은 침묵하는데 인간은 필사적으로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끝없는 불화. 뫼르소는 그 불화를 억지로 봉합하려 하지 않습니다. 슬프지 않으니 울지 않았고, 사랑을 확신하지 못했으니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죠. 그의 선택은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짜 감정을 연기하지 않으려는 정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진심보다 ‘진심처럼 보이는 것’을 더 신뢰합니다. 그래서 그의 무표정은 냉담함으로, 그의 침묵은 반사회성으로 번역됩니다.


사회적 감정의 형식은 원사이즈 유니폼 같습니다. 누구에게도 꼭 맞지 않지만 모두가 입어야 하는 옷이죠. 사람들은 그 옷에 몸을 맞추기 위해 감정을 재단합니다. 정해진 순간에 웃고, 약속된 만큼만 슬퍼하며, 사회가 허락한 시간 안에서만 애도하려 애씁니다. 진심은 투박하고, 잘 연기된 감정은 매끄럽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후자의 안정감을 더 믿게 되었습니다. 뫼르소는 그 유니폼을 입지 않고 맨몸으로 세상 앞에 선 이방인이었습니다.


감정의 유니폼은 생각보다 훨씬 널리 퍼져 있습니다. 요즘도 ‘피해자다움’이라는 말이 있죠. 피해자는 울어야 하고, 웃어서는 안 된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슬픔의 방식에도 각자의 언어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울음으로 버티고, 누군가는 웃음으로 견딥니다. 감정의 표현이 다르다고 해서 감정의 진심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정해진 감정의 문법으로 타인을 판단합니다.


이 80년 전의 통찰은 지금의 소셜 네트워크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누군가의 부고 앞에서 우리는 자동으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문장을 남깁니다. 그 말은 무해하지만, 종종 공허하죠. 슬픔의 깊이보다 슬픔의 속도가, 감정의 진실성보다 공감의 타이밍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됐습니다. 감정의 진정성은 즉각 반응이라는 효율성에 밀려납니다.


물론 뫼르소는 감정이 없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사회의 언어가 아닌 감각의 언어로 느끼는 사람입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피곤하다”라고 말하죠. 세상은 이를 무심함으로 해석하지만, 그 지독한 피로가 어쩌면 슬픔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슬픔은 눈물이 아니라 햇빛의 무게이고, 공기의 밀도입니다. 그는 의미보다 감각으로 세계를 먼저 느끼는 사람이었고, 바로 그 지점에서 사회적 문법과 충돌합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사형을 앞둔 뫼르소에게 신부가 찾아와 신의 자비를 이야기할 때 그는 폭발합니다. 신도, 구원도, 내세의 의미도 모두 부정하죠. 대신 그는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을 받아들입니다. 그건 허무의 절망이 아니라 실존의 해방에 가까운 순간입니다. 세상의 무관심과 자신의 존재가 화해하면서 그는 기묘한 평화와 자유를 얻습니다. 연기를 멈춘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고요입니다.


《이방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사회가 정한 감정의 표준은 질서를 유지하는 데 효율적 일지 몰라도, 그게 타인을 심판하는 잣대가 되는 순간 얼마나 폭력적인가. 감정은 규격품이 될 수 없습니다. 느끼는 방식과 속도, 표현의 언어는 모두 다르니까요. 뫼르소의 죄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 데 있는 게 아니라, 사회가 만든 무대에서 감정을 연기하지 않은 비협조에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 앞에는 선택이 남습니다. 감정의 유니폼을 입고 안정감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오해와 고립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 한 번쯤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내 언어로, 내 속도로, 내 방식으로 슬퍼하고 사랑하고 있는가. 세상의 무관심은 바꿀 수 없지만, 그 안에서 불필요한 연기를 멈추는 일은 여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사회라는 거대한 연극 무대 위에서 진짜 나로 서 있는 일, 어쩌면 그것이 감정이 소멸한 시대의 마지막 저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ssy

keyword
이전 03화죄와 벌 — 벌보다 무서운 건 양심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