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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짓기 Oct 22. 2024

아버지의 숟가락


그날은 비가 내렸다. 번개가 눈앞에서 번쩍거렸다. 벼락이 내 울음을 가로막았다. 서류를 준비하느라 안부 전화 한 통 드리지 못한 일이 후회도 되지 않았다. 죽으면서까지 자식의 앞길을 가로막는 부모라는 원망이 앞섰다.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아버지의 임종 소식이었다.

병원 영안실에 도착했을 때, 죽음을 인정하라는 듯 직원이 차가운 냉동서랍을 열어주었다. 자식에게 부모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여기 누워 있으면 어떡하느냐고 아버지를 흔들었다. 결혼 3년 동안 내 집 갖기를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내일이면 그 꿈을 이루는 아파트 청약일인데, 죽어도 하필 이런 때 죽느냐고, 상복을 입고 어떻게 청약을 하러 가느냐고 아버지께 따지고 싶었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이미 영혼이 빠져나간 아버지는 조용했다. 왜 사람을 이런 곳에 가두어 두느냐고 직원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럼 이 여름에 밖에 내놓을까요?”

영안실 직원의 이 한 마디에 내 모든 말이 묻혀버렸다. 입관을 하고 장의차를 타고 엄마가 누워계시는 산소까지 가는 동안 행복은 후다닥 나를 비켜 갔다.

아버지를 묻고 돌아와서 본 아버지의 방, 위급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늘 화투 패를 두고 계시던 아버지를 대신해 개다리소반 위에 물크러져 가던 김치 한 접시, 국은 반쯤 엎질러져 있었고 씹다 만 듯한 밥알 묻은 숟가락이 개다리소반 저만치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제야 목젖 위로 울음이 삐져나왔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부터 결혼까지 아버지의 밥상을 차리면서 국을 몇 번 끓여드려 보았던가. 언제 정성껏 따뜻한 밥 한 번 드려본 적 있었던가. 며칠씩 누렇게 눌러 붙은 전기밥솥의 밥을 밥상에 올리면서 얼마나 생색을 내며 아버지를 대했던가. 결혼식 날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던 아버지의 눈물을 보면서도 가슴에 짐처럼 눌려있던 아버지를 벗어나는 게 좋아서 싱긋싱긋 얼마나 웃었던가.

1924년생 아버지. 청춘을 일제 강점기에 빼앗겼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귀까지 멀어버린 아버지. 덕분에 자식들에게 큰 목소리와 가난을 물려주신 아버지. 나이 들어서는 편한 밥 한 번 드셔보지 못했던 불쌍한 아버지. 말라비틀어진 밥알 몇 묻은 숟가락을 유산으로 남기고 돌아가셨다.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남편이 회사에서 무사고 상으로 받은 은숟가락이었다.


“나 죽거든 남은 재산 다 너 주마.”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저녁밥상 앞에서 내 숟가락 고봉 가득 이 말을 담아주셨던, 시아버님이 쓰러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목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가래를 뽑아내어야 하고, 끼니때마다 코에 꽂힌 링거호스를 따라 간신히 미음을 넘기며 숟가락을 들지 못하시는 아버님을 보며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게 사람이란 걸 느꼈다.

‘아버님, 이젠 그만 사세요. 저희들 돈이 없답니다.’

중환자실 병원비를 걱정하며 수없이 꿀꺽, 삼켰던 이 말들은 마음속에서 몇 배로 불어나 돈 앞에서 허물어졌다. 아버님의 엉덩이며 발뒤꿈치,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욕창이 끊임없이 생겼다. 1년 남짓 중환자실을 형님댁과 번갈아 드나들며 힘들다는 생각마저 지쳐갈 무렵, 마지막 남편의 퇴직금을 정산해야 했다. 아버님이 내 숟가락에 얹어주신 그 말을 되새김질 한 번 하지 않고 왜 꿀꺽, 삼켜버렸을까. 뒤늦은 후회를 했다. 이 숟가락에 담겨있던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남편에게 온갖 험한 말을 쏟아 부었다. 가난을 물려주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자식들에게 무얼 남겨줄 것이냐고. 새벽마다 정한수에 기도소리를 담고 계실 어머님마저 공범자로 몰아붙였다.

물리 치료도 소용없는 아버님의 몸. 휠체어며 침대를 싣고 퇴원을 서두르며 침대 옆 캐비닛을 열었을 때, 입원할 때 가져왔던 아버님의 은숟가락이 두꺼운 먼지를 둘러쓰고 아버님처럼 누워 있었다. 기억마저 놓쳐버린 아버님이 멍하게 바라보았을 병실 천장에 형광등만이 흐릿한 1년을 기억하는 듯, 빛을 흔들고 있었다.

1922년생 아버님. 역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징용에 끌려가셨음에도 살아서 돌아오신 의지력 강한 분, 6.25 전쟁을 겪으셨고, 아들이 없는 큰아버님께 끝까지 자식을 양자로 주지 않으신 아버님. 시조부님이 남겨주신 제법 많은 재산을 늑막염 치료비로 쓰셨고, 뇌졸중 4년 끝에 자식들에게 먼지 쌓인 숟가락을 유산으로 남겨놓고 돌아가셨다.


남편이 비틀거린다. 일제강점기도 거치지 않았고 6․25전쟁도 겪지 않은 남편, 사는 게 고달픈 모양이다. 신용 회복위원회에 조정신청을 끝낸 저녁, 막걸리를 상에 놓고 오랜만에 삼겹살을 구워먹었다. 지금까지 마음 놓고 늦잠 한 번 자지 못한 사람, 이만 원이 넘는 밥 한 번 먹어보지 않은 내 남편, 어디 가서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 못한 사람이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눈시울을 붉혔다.

열심히 살았지만 특목고에 가고 싶어 하는 큰딸에게 공납금이 비싸서 보내지 못하는 가난한 부모가 되어버렸고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빚을 조롱조롱 등에 매달고 사는 못난 부모가 되어버렸다. 몸살이 나서 끙끙거리면서도 직장을 가지 않으면 몸이 더 아파버리는 일벌레 같은 사람. 그동안 나 모르게 얼마나 빚 독촉 전화에 시달렸는지 수신번호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을 수 있어서 속 편하다고 했다.

아버님을 유독 많이 닮은 남편은 막걸리를 보니 자연스럽게 아버님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농번기 때 콩알 만한 땀을 흘리며 콩타작 하던 아버님 이야기, 고추 밭에서 풋고추를 된장에 같이 찍어 먹었던 이야기, 남의 인삼밭에 실수로 불을 냈을 때 지서에 찾아와 무릎을 굻었던 아버님 이야기를 했다. 세상에 무릎을 꺾으면서까지 삶에 최선을 다한 아버님을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부끄러웠다. 세월의 마당에서 자식들이 있는 뒤란으로 노년을 짊어지고 피란 온 아버지들에게 당신은 최선을 다하지 않으셨다고, 자식들에게 무책임한 부모밖에 되지 못하시느냐고 울부짖었던 날들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이 아버지들에게 나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진정 따뜻한 밥 한 그릇 제대로 대접해 보았는지, 투정만 부릴 줄 아는 아내, 남편이 어떻게 아파왔는지도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아내. 그동안 날카로운 말들을 얼마나 가슴에 찔러댔는가.

자식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 온몸의 진액까지 다 빼고 사는 아버지들에게 세상은 쉽게 타협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력서를 들고 세상에 뛰어든 뒤늦은 지금에야 실감한다. 아파 누워있을 때조차 밥맛 없어본 적 없는 내 입에 오돌오돌한 삶 한 숟가락 떠 넣는다. 씹을수록 쓴물이 배어나온다. 아버지 숟가락에 묻어있던 밥알이, 아버님 숟가락에 얹혀있던 먼지들이 내 몸 깊숙이 들어온다. 소화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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