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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Oct 11. 2019

한옥을 수리하며

노동이 체질인가? 희한하게 기분이 좋네.

올해 접어들면서 남편은 계속 집을 수리할 때가 되었다는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나는 남편이 말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했지만, 선뜻 그 말에 호응을 할 수가 없어 무성의한 대답으로 회피했지요.


"그러게요, 이제 니스칠을 할 때가 되긴 했어요?"

"언제쯤 할까?"

"날이 풀리면 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기 싫은 숙제처럼 남은 한옥 수리는 미루고 미루어지다 여름을 지내고 가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추석이 다가 올 무렵 나는 남편에게 경망스러운 제안 하나를 하고 말았습니다. 추석 때 식구들이 오면 조카들이랑 니스칠을 하면 어떻겠냐는.


남편은 버럭 화를 냈습니다.

 "모처럼 할머니를 찾아온 조카들에게 일을 시키는 법이 어디 있어? 그들은 가족이기도 하지만 우리 집을 찾아온 손님이야. 설령 형님들이 애들한테 일을 하라고 시켜도 이 명절에 굳이 먼지를 일으키며 그 애들에게 일을 시키고 싶어?"라고.


말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했던 말은 본전은커녕 속 좁은 여편네의 꾀부림으로 결론나 버렸으니까요.


물론 남편에겐 그리 말했어도 조카들에겐 꺼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조카들이 오면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마루에서 뛰어내려 조카들을 안아주시는 어머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형님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자식들을 내가 무슨 수로 일을 시키겠냐구요? 직장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어 빈둥거릴 수 있는 휴일이 제일 좋을 조카들에게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나 역시 생각이 모자란 사람은 아니란 뜻입니다. 괜히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꺼내 좁은 속만 내보인 꼴이 되어 더욱 속상했습니다.


그렇게 추석이 지날 때까지 미루어졌한옥의 니스칠이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전문가의 손을 빌리지 않고 비전문가인 남편과 나 단둘이서 말입니다.


그동안 한옥 수리는 아버님이 전문가들에게 맡겨 관리하셨습니다. 니스칠이며 페인트 칠, 기와 수리까지. 그런데 재작년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남편이 집수리는 이제 우리 손으로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수리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면서요. 아주버님들께선 아버님이 물려주신 건물에서 나온 월세로 어머님이 살아계신 동안에는 집수리며 세금 문제들을 해결하라고 하셨지만 남편은 공동의 재산을 이제는 우리 집이 된 한옥을 수리하는데 쓸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아무리 형제간이라도 돈 관리는 철저히 하는 게 맞지요. 형님들은 남편에게 건물 관리를 맡긴 것이 미안해서 돈을 써도 된다고 하셨지만 괜히 의심받을 행동은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는 저 역시 동의하는 바였습니다.


'내 집은 내 손으로 수리해서 정 한번 듬뿍 느껴보자.' 굳은 결의로 시작했지만, 하~ 힘들다. 

특히 남편에게 미안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은 일이 너무 없어서.

남편은 니스칠 전에 나무들을 잘 다듬어 주었습니다. 기존에 벗겨진 니스들을 다 제거해 주어야 해서 입니다.

그다음 바람을 일으켜 먼지를 제거했습니다. 이래서 노동이 힘든 것인가 봅니다. 우리는 이미 불쌍한 일꾼이 되어 있었습니다.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쓴.


그런데 먼지까지 제거하고 나니 다음 일은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이제 붓을 들어 기둥과 문짝, 툇마루에 니스칠만 하면 됩니다. 니스칠은 재미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읽었던 <톰 소여의 모험>에서 톰의 친구들이 왜 그리 톰이 바르던 페인트 칠을 하고 싶어 했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니스칠을 해서 미끈하게 변한 기둥이며 툇마루를 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뭔가 일의 성과가 보인 거 같아 뿌듯했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이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 왜 그렇게 오랫동안 미루어 왔는지 후회도 됐습니다.


나는 몸을 써서 하는 일에 더 큰 만족감을 느낍니다. 아마도 난 머리를 쓰는 일보다 몸을 쓰는 일에 더 성과를 보일 사람인가 싶습니다.

우리는 먼지 낀 뿌연 안경 너머로 새롭게 옷을 입은 한옥의 한 귀퉁이를 보며 웃었습니다. 비록 한 귀퉁이를 해결한 것이고, 앞으로 2~3주는 더 해야 할 일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생겼으니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남편은 니스칠이 끝나면 문풍지도 새로 발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동이 체질인 나는 또다시 투덜거렸습니다.

"일을 좀 나눠서 해요  올해는 니스칠을 했으니 문풍지 바르는 일은 내년 봄에!"

"또 게으른 소리한다. 일은 시작했을 때 마무리 지어야지 왜 자꾸 미루려고만 해?"


우리는 올해 문풍지 바르는 일까지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바보스럽게도 또 투덜거리는 말을 해서 게으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에 왜, 난, 자꾸 기운 빠지는 말을 할까요?

나는 진짜 머리가 나쁜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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