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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Jun 23. 2021

살구니 매실이니, 너의 이름은?

게으름의 이유

계절이 주는 삶은 반복된다.


의문이 든다. 난 게으른 사람일까? 부지런한 사람일까?

 

기준이 없으니 선뜻 대답이 어렵다. 어떤 땐 두 팔을 쫘아악 벌려도 부족할 만큼 일을 하니 부지런한 사람 같기도 하고, 노동 시간이나 자기 계발에 투자하는 시간을 따져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결국 구체화되지 않은 모호한 잣대는 극명한 성격을 규정짓지 못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예외 없이 찾아오는 계절은 나를 부지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환경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변화에 맞춰 행동을 해야 한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봄옷을 준비하고 겨울용품을 정리한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 여름옷을 꺼내고 냉방용품을 손본다. 계절의 변화가 우리로 하여금 부지런을 떨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의 계절에 집중해 사는 사람들은 결코 경험하지 못할 일이다. 이런 단순한 예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단일 기후를 가진 나라 사람들보다 더 부지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노출됐다는 건 증명된 셈이다. 그러니 그 안에 사는 나 역시 부지런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런데 나의 부지런함은 여기에 하나를 더 플러스하고 있다. 마당이 있는 한옥에 살고 있으니 그 마당에 존재하는 생명들을 키워내야 하는 일로 말이다. 생명을 키운다는 건 자연이나 사람이나 벅차고 버거운 일이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작년 이맘때쯤이다. 그때 난 게으른 농부가 꾀부리듯 늦은 수확을 합리화했다. 수확을 늦추는 건 과일에 풍부한 맛이 깃들도록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도. 올해도 그랬다. 때를 기다렸다. 하여 올해의 수확물에도 작년 못지않게 풍부한 맛이 깃들었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아주 깊~게. 초록 매실에 익숙한 사람들은 노란 매실을 보고 놀랄 것이다. 코를 현혹시키는 고 달콤한 향에 취해서 말이다. 단언컨대 노란 매실 앞에서는 누구나 코를 씰룩거리게 된다.

매실이 너무 익어 살구가 되었다. 향이 좋아 매실청을 담갔는데 이렇게 익은 매실로 청을 담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작년에 매실 수확을 하고 쓴 글이 있어 작년의 수확물과 올해의 수확물을 비교해 보았다. 작년보다 올해의 수확이 배가 늘었음을 알 수 있다. 작년에는 빨간 바구니와 파란 바구니에 매실이 가득 찼는데 올해는 스테인리스 그릇이 하나 더 늘었다. 그릇이 는 만큼 나의 수고도 늘었다. 수확은 기쁨과 수고가 공존하는 동전의 양면이다. 힘들어도 포기할 수 없는 책임을 전가한다.

올해의 매실 수확물
작년의 매실 수확물
불공정한 풍년

가끔은 과함이 불편을 초래하기도 한다. 작년에 담근 매실청이 그대로 있는데 새 매실청을 담가야 하는 지금의 경우처럼 말이다. 겹장이란 게 있으니 겹매실이면 어떨까 싶어 작년 매실청에 올해 딴 매실을 넣었다. 향이 배가 되길 바라며 설탕도 추가했다. 또 다른 항아리엔 올해 딴 매실을 넣어 청을 만들었다. 지금 먹고 있는 매실까지 합하면 매실 항아리만 세 개다. 불공정한 풍년이다. 


노랗게 익은 매실은 따로 담아 이른 가을에 먹기로 했다. 그럼에도 남은 매실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매실주를 담갔다. 누가 먹을까 싶지만 설탕 범벅 매실을 또 만들 수는 없어 내린 임시방편이다. 나무에 달린 자두도 모두 따 자두주를 만들었다. 자두로 술을 담근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지만 이 또한 당장 먹을 수 없으니 내린 처방이다.


생각해 보니 나의 게으름에는 이유가 있었다. 필요성의 부재가 그것이다. 당장 필요하지 않으니 서두르지 않았던 것이다. 


공정한 풍년이란 적당함이다. 부족하여 아쉬움이 남아서도, 넘쳐나 처치 곤란함을 느껴서도 안 된다. 적당함이 딱 좋다.


내 주변엔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 청을 먹는 사람이 줄었다. 단짠의 매력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이러니 우리 집 과일청들이 남아도는 수밖에 없다. 내돈내산도 아니고 내 수고로움이니 올여름에는 아이스크림 대신 매실과 자두, 석류청에 얼음을 가득 넣어 목이 얼얼해지도록 드링킹해 볼 일이다.

왼쪽은 작년에 담은 매실청에 올해의 매실을 더 넣었고, 오른쪽은 올해 담은 매실청. 설탕 위에 올리고당을 넣으면 더 잘 녹는다고 한다.
익은 매실로는 매실청을 담고, 초록매실과 자두로는 과일주를 담갔다. 자두로도 술을 만드는지 모르지만 이것 역시... 그냥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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