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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Jul 07. 2021

나의 리틀 포레스트에 던져진 작은 호박씨의 기적

너, 잘 익은 호박씨였구나.

저렇게 던져 놔도 내년에 토마토가 열리더라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는 아름다운 계절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특히 음식이 주인공이 되어 준 장면은 생존을 너머 구도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실로 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는 영화라 하겠다.


지금과 같은 여름이면 혜원(김태리)과 엄마(문소리)가 나란히 앉아 토마토를 먹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 장면에서 혜원 엄마의 새빨간 토마토는 참으로 맛나 보였다. 쓰읍 소리와 함께 토마토 과즙이 그녀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땐 내 입 안에서도 여름의 신선함이 톡톡 터지는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작정하고 만들어낸 장면은 아니었을 텐데 제대로 된 먹방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먹는 모습 하나로 타인의 입맛까지 사로잡았던 엄마가 토마토를 먹다 말고 꽁지 부분을 땅에 던지며 한 말이 있다. 잘 익은 토마토는 땅에 던져 놓기만 해도 싹을 틔운다는.


신기했다. 과연 그럴까? 정말 토마토는 땅에 던져놓기만 해도 싹을 틔우는 강한 생명력을 지닌 작물일까? 갑자기 땅 위에 철퍼덕 엎어진 그 토마토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토마토의 미래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모녀의 다정한 모습만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토마토 따위는 영화가 끝나기 무섭게 잊힌 안타까운 진실이 남은 채 말이다.


그런데 영화 속 혜원 엄마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걸 증명해 준 일이 며칠 전 우리 집에서 일어났다. 그 대상이 토마토가 아닌 호박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던져둔 씨앗이 싹을 틔우다

일의 시작은 몇 달 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집에서 단호박을 쪄 먹을 때 있었던 일이다. 평소 단호박이나 감자를 자주 먹었기에 그 일은 특별할 것도 기억에 남을 것도 없는 그저 그런 날의 그런 일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날의 호박이 유난히 딴딴하고 주황빛이 강해 냄비에 오르기 전부터 입맛을 자극하고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면 달랐을까.

 

반으로 잘라낸 호박 안에서 쏟아진 씨들은 단박에 잘난 호박의 씨라는 걸 알게 했다. 통통하게 배가 부른 것을 볶어내어 호박씨라도 까고 싶었지만 그 수고마저 귀찮아 그냥 버릴까? 하다 호박의 특별한 사랑이 아쉬워 탯줄처럼 가늘게 엉킨 실들을 떼어내고는 텃밭에 씨앗을 던져두었다. 씨앗이 땅과 만나면 작은 우주를 탄생시킨다는 기적 같은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게 했다. 그런데 간절하지도 않은 그 믿음에 응답이 왔다. 씨를 버려둔 자리에서 싹이 돋고 줄기가 자란 것이다. 이게 뭔 일인가 싶도록 신기했다. 노랗게 입을 벌린 꽃들은 '이런 꽃을 보고도 못생겼다고 말할 수 있어'라며 시위라도 하는 듯했다. 맛 좋은 호박이 꽃마저 예쁘게 피워낸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가 먹었던 단호박의 2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모를 꼭 닮은 다부진 모습을 한 채로 당당하게.

호박꽃을 못생겼다고 말하는 사람은 호박꽃을 보지 못한 사람이다.
지지대와 끈을 타고 호박 덩굴이 뻗어나갔다


사실 아무 씨앗이나 땅에 던져 놓는다 하여 싹을 틔우는 건 아니다. 땅의 촉촉한 기운과 태양의 따사로움을 제대로 받아낸 씨앗만이 튼실한 싹을 틔우는 것이다. 한낱 식물의 성장조차 이럴진대 사람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사랑과 보호만이 제대로 된 아이를 키워낼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연약한 식물의 모습을 통해 또다시 깨닫는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며 느껐던 마음 정화를 우리 집의 작은 정원에서 온전히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보상이나 칭찬이 없어도 말없이 생명들을 키워내는 나의 리틀 포레스트를 보며 그것이 기진 힘만은 믿기로 했다. 너그럽게 생명을 키워내는 여유로움 같은 거 말이다. 땅을 가꾸는 사람이 땅보다 좁은 마음을 가질 수는 없다. 이곳에서 나의 마음이 얼마나 자라는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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