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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Nov 17. 2022

사랑하는 사람은 설렘으로 다가와

너였구나, 내 우울의 원인

 자연은 자비롭다. 시원한 흐름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그 시원함에 몸서리칠 때 세상을 온통 따뜻한 색으로 물들여 온도를 조절하니 말이다. 보는 눈은 뜨겁고, 그 앞의 선 얼굴은 차갑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은 흔들리는 바람과 함께한다. 내려앉지 못하니 쓸쓸하고, 쓸쓸하니 또 흔들린다.


 이유 없이 우울해지는 건 이유가 있어서일까. 아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을 찾지 못해 우울한 걸까. 우울한데 우울의 이유를 찾지 못해 우울했다. 그러다 계절을 탓해 버렸다. 가을이라 우울하다. 햇빛이 줄어 세로토닌이 줄어든 탓이다. 그것을 원인으로 삼자. 그래야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데 아니었다. 해결되지 않았다. 누구나 그래. 가을이면 누구나 우울해,라고 계절을 탓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기침 때문인가?


요사이 기침이 멈추지 않고 있다. 감기 뒤끝이 너무 길다. 일주일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하루에 한 번은 얼굴이 빨개지도록 기침을 한다. 가슴이 아프다. 이러다 폐렴이라도 걸리는 거 아냐, 걱정을 한다. 걱정이 걱정으로 해결되면 걱정이 없을 텐데 걱정은 또다시 걱정을 낳고 말았다. 뫼비우스 띠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나날을 꾸역꾸역 살아내는 게 힘들다. 주말만이 나의 삶인 것처럼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나날을 의미 없게 만들고 있다. 하루하루가 자잘한 인생의 조각들인데 그 하루하루를 구멍 내고 있다. 구멍이 메워져야 바람이 스며들지 않을 텐데. 구멍 사이로 스며든 바람이 살벌하게 차다. 공간에 갇혀 지내서 그런 걸까. 여행을 다녀오면 나을까.


단풍 구경을 나섰다. 조금 늦었다. 지난 주말에 나왔으면 불타는 가을을 볼 수 있었으려나. 지난 주말? 헛웃음이 나온다. 지난 주말엔 일을 했다. 아직 감기가 낫지도 않았는데 몇 년을 미뤄두었던 일을 했다. 하필 그때. 타이밍도 절묘하지. 일하기 싫어 죽겠는데 남편이 일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나 보고는 쉬란다. 아픈 사람에게 어떻게 일을 시키냐고. 혼자 할 수 있단다. 퍽이나. 아들을 부르겠지. 어머니께 부탁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눕고 싶은 몸을 이끌고 문풍지를 뜯었다. 가슴을 찢어내듯 박박 찢었다. 문짝 하나를 뜯어내는 데 얼마의 시간이 흐른 것인가. 언제 그 많은 문짝을 다 뜯어낼지 기약조차 없었다. 시작했으니 마무리는 지어야 하는데 한숨이 흘렀다. 어머니께서 비법을 알려주셨다. 수건에 물을 묻혀 문종이를 두드리란다. 한지에 물이 스며들자 벗기기가 쉬워졌다. 맞았다. 일이 수월해졌다. 빛이 바랜 한지를 뜯어내고 새 한지를 발랐다. 뜯어내고 바르고. 뜯어내고 바르고. 무한 반복의 반복. 한 겹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일을 겨울이라 두 겹을 발랐다. 두 겹은 일도 두 배다. 주말을 기다리며 보낸 나날들이 의미가 없어졌다. 주말도 그저 그런 나날이 되었다. 결국 뜯고 바르는 일은 일요일까지 이어졌다. 일주일이 통째로 날아갔다. 지난주는 그랬다. 


다소 늦은 단풍이라도 단풍은 단풍이었나 보다. 도로가 붉게 타고 있었다. 눈을 불태우고 집에 들어서니 우리 집에서도 단풍이 맞는다. 환한 전화 소리와 함께. 전화기에서 빛이 난다. 이쁜 내 딸. 초록 화살을 왼쪽으로 밀어 전화를 받았다. 딸~.


세상이 환해졌다. 언제 내가 우울했지? 의아했다. 가슴이 이렇게나 꽉 차는데 언제 바람이 일었나 싶다. 밝은 딸의 목소리가 가슴을 뛰게 했다. 따스한 햇살을 비춰주었다. 내가 우울했던 것은 누군가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지금 내 곁에 없는 그 누군가. 그리움의 이름은 그리움만이 아니다. 그리움은 사랑이며, 그리움은 설렘이다. 설렘이 이성 앞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더 이상 이성 앞에선 설레지 않은 나는 이제 나의 아이들 앞에서 설렌다. 나를 부르는 그 다정한 말 앞에 설레고 있다.


이제 우울은 없다. 이유를 찾아서다. 가을이라고 괜히 우울했던 게 아니다. 이유가 있어 우울했다. 이유를 찾은 지금, 더 이상의 우울은 없다.

  

내방 창문에 바른 문풍지. 이건 쉬웠지.


밤에 보니 문풍지가 더욱 깨끗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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