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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Mar 05. 2024

미치도록 행복한 날 눈물 흘리며 토했다

"난 취한 적 없어. 술에 강하거든."

내가 말했다.


"어럽쇼. 그건 술을 제대로 먹어보지 않아서지. 맥주 한두 캔 마시고는 술 마셨다 한 사람이 뭘 믿고 술에 강하다는 거야."

남편이 비웃었다.


그렇다. 난 한 번도 술에 취한 적이 없다. 늘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헤롱거렸기에 나 자신은 술에 강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술을 마셔도 기분 좋은 날, 기분 좋게 마셨기에 술이란 가히 벗으로 삼을 만한 위인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건 단지 술을 제대로 마셔보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일 뿐이었다. 무지했기 때문에 착각을 했고, 착각을 했기에 망언을 내뱉을 수 있었다.


그동안 난 순한 얼굴을 한 순한 술을 마셔왔다. 센 얼굴을 한 센 술이 세상에 넘쳐나는데도 그것들을 모르고 순한 술이 세상의 전부인 걸로 착각을 했다. 술술 넘어가는 술은 그저 마신 양에 취하는 것이지, 질이 취기를 결정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세상 모르는 것 투성이인 분야에서 그 분야의 강자인 것처럼 떠들어댔다. 진심으로 무지해서 진심으로 용감했다.


반면 나보다 술을 잘 아는 남편은 나이가 들수록 술을 줄였다. 직장에서도 어쩌다 마셨고, 마셔도 예전처럼 취할 때까지는 마시지 않았다. 당연히 집에서는 술을 금했다. 남편의 상황이 이러하니 집에서의 술꾼은 나뿐이었다. 나 혼자만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마셔야 했다.


그런 나에게 술친구가 찾아오는 날은 기쁜 날이었다. 게다가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친구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나이 들어 좋은 것 중 하나가 이것이다. 성인이 된 자식친구를 할 수 있다는 거. 그런 날은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남편이 하나도 아쉽지 않다. 남편이 마시지 않는다고 해도 즐거운 마음으로 술을 마실 수 있다.


아들이 휴가를 온다기에 술을 샀다. 술 마시는 걸 좋아하지 않아 스스로 알코올분해효소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아들을 핑계 삼아, 내가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들을 위한 것이라며 술을 샀다. 남편이 만만한 술이 아닐 텐데 걱정을 해도 나란 사람은 취한 적이 없는 사람임을 강조하며 먹어본 적도 없는 술을 샀다.


그리고 아들과 술을 마셨다. 미치도록 행복하게 마셨다. 저절로 웃음이 나고, 목소리가 커졌다. 비록 치열하게 살아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부모와 다정하게 앉아 농담을 주고받으며 술을 마셔주는 아들이 있어 행복했다. 맥주만 즐겨 마시던 사람이 도수 높은 술에 맥주를 섞어 아무렇지도 않게 꿀꺽꿀꺽 마셨다. 아들이 엄마 얼굴이 너무 빨개졌다며 걱정을 해도 집이니 괜찮다고 했다.


몸이 조금 흔들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방으로 와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세상 편했다. 그런데 잠시 후 뭔가 이상했다. 속에서 울컥울컥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는 증상이다. 임신했을 때 신물 나게 경험했던 증상. 구토의 전조 증상이었다.


변기를 붙들고 구토를 하며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기분 좋은 날 이런 일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지금까지 술을 마시고 구토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저렇게까지 술을 마셔야 하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그 이해 못 할 일을 내가 하고 있었다. 술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질이 문제였다. 도수가 높은 술은 괜히 도수가 높은 게 아니었다. 아니면 내가 술을 잡탕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난 미치도록 행복한 날에 억울함의 눈물을 흘리며 구토를 했다.


그날 이후 깨달은 바가 크다. 조금 알아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제대로 알게 되면 쉽사리 안다고 말할 수가 없어진다. 그것은 제대로 안 사람만이 자신이 알지 못한 것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술을 몰라 술에 강하다 뻐긴 나는 술을 알고 그가 두려운 존재임을 깨달았다. 나란 사람도 땅과 인사를 나눌 수 있고, 변기를 안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소한 일에서 놀라운 경험을 했다. 잘 모를 때는 무조건 겸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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