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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함을 지키는 마음 하나

아이들에게 건넨 단어 10가지

by 강석효

요즘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내게 작은 창 하나를 열어주는 듯하다. 그 창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면, 바람이 분다. 잊고 있었던 오래된 바람, 젖은 연필심 냄새와 지우개 부스러기 냄새, 고무줄놀이와 달리기로 채워진 운동장의 먼지 냄새 같은 것이 훅 하고 코끝에 스친다.


그날도 그랬다.
아이들에게 별다른 준비 없이 그저 아무렇게나 열 개의 단어를 건네보았다. 마치 동네 어귀 할머니가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을 꺾어 손주에게 쥐여주듯이 말이다. 단어는 ‘체중계, 점심밥, 도랑, 컴퓨터, 친구, 무게, 대화, 웃음, 고민, 하늘’… 대체로 흔하디흔한 단어들이었다.


그 단어들이 아이들의 손끝에서 문장이 되고 이야기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10분도 되지 않았다. 어떤 아이는 체중계 위에서 ‘119kg’이란 숫자를 보고 비명을 질렀고, 또 어떤 아이는 여름날 도랑에서 친구들과 발장구치고 엄마가 싸준 김밥을 나눠먹던 추억을 꺼내어 놓았다. 컴퓨터와 친구가 대화를 나누며 고민거리를 풀어가는 엉뚱한 이야기에서는 나도 모르게 소리 내 웃고 말았다.
‘내가 가진 특별한 건 뭘까?’ 하고 조용히 자기 마음을 들여다본 친구의 글에서는, 꼭꼭 숨겨놓은 보물상자를 조심스레 여는 듯한 서툰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아이들의 글을 보며 세 번 놀랐다.


첫째는 그 상상력이다.
누가 이 평범한 단어들로 그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줄 알았겠는가. 어른들은 글을 쓰려면 먼저 제목부터 고민하고, 소재가 고갈되었다고 투덜대고, 결국은 백지 위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는 ‘요즘은 감성이 말라서 그래’ 하고 말아버린다.
그런데 아이들은 다르다. 단어 하나하나를 자기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거기엔 세상의 경계도 없고, 표현의 제약도 없다. 그냥 느낀 그대로, 상상한 그대로 뚝딱뚝딱 글을 지어낸다.


둘째는 즐거움이다.
아이들의 글에는 어떤 목적도 없다. 잘 보여야 한다거나, 점수를 받아야 한다거나, 칭찬을 들으려는 마음 같은 게 없다. 그냥 쓰고 싶어서 썼고, 재미있어서 웃겼고, 자기 마음속 무언가가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글을 읽으면서 몇 번을 웃었는지 모른다. 마음 한가운데에 무거운 돌 하나가 빠져나간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셋째는 순수함이다.
어른들은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많은 걸 놓치고 살아간다. 관계도, 감정도, 때로는 사랑도. 하지만 아이들은 놓치지 않는다. 좋아하는 건 좋아한다고 말하고, 궁금한 건 묻는다.
글 속에서 아이들은 엄마를 생각하고, 친구를 그리워하고, 혼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민을 한다.
그 아이들이 써 내려간 문장을 읽으며, 문득 ‘순수함이란 건 이렇게 조용히 사람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는 거구나’ 싶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오늘따라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나는 대학 새내기 시절부터 지금껏, 늘 같은 질문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왔다.
‘어떻게 하면 내 안의 순수함을 지킬 수 있을까?’
그 질문은 나에게 있어 믿음의 기도였고, 일상의 묵상이었다. 사람들 틈에서, 책상 앞에서, 때로는 거울 앞에서 나는 묻고 또 물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오늘도 아이들 앞에서 다시 꺼내어 본다.


아이들 속에 있는 순수함을 보며, 나 역시 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어린 날의 나를 다정히 꺼내본다. 어쩌면 그는 지금도 내 안에서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오래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오늘도 나는 기도한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내 마음을 지키며, 그 마음 안에 살아 있는 순수함을 잃지 않기를.
그 순수함이 내 삶의 향기가 되고, 이웃을 향한 온기가 되기를.
그리고 언젠가 주님 앞에 설 그 날, 그분께서 웃으며 이렇게 말씀해주시기를.


“그래, 너는 마음을 지켰구나. 내가 네 안에서 보았던 그 어린아이의 눈동자, 그걸 내가 참 좋아했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 마가복음 10장 14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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