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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예 Oct 27. 2024

각자의 서사

이래서 좋아했어

누구나 책 한 권은 족히 쓸 각자의 서사가 있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챕터도 있고 솔직함을 가장해도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을 수 있다. 책이 만들어지면 누군가는 표지만 읽고 쓱 지나갈지도, 또 누군 표지를 열어 하나하나 읽어 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혼밥이라는 단어마저 흔치 않던 시절, 혼자 축구를 보러 다녔다. 그러다 이듬해 만난 학교 동기가 싸이월드를 봤다며 물었다. "혹시 너도 수원팬이니?". 귀하디 귀한 조합이었다. 동갑에 수원 팬인 여자인 친구, 거기에 같은 과 동기라니. 그렇게 그들은 십 년이 더 넘는 시간을 함께 축구를 보러 다니게 됐다. 그들이 추억을 공유한 축구장에서의 날들을 풀어내면 수십, 수백 페이지는 나올 거다.


누구는 3순위 드래프트 선수로 뽑혀 입단했지만 같은 해 첫 번째로 뽑힌 라이벌 선수에 가려졌다. 경기에서 자주 보기도 어려웠던 그는 몇 년을 묵묵히 자기만의 서사를 써 내려갔다. 3순위 골키퍼에서 후보 골키퍼로 그리고 가장 처음 라인업에 적히는 든든한 주전으로. 십년이 지난 지금, 그의 표지는 팀의 주장이다.


어떤 헤드헌터는 한 경력자의 이력을 보다 느낌이 왔다. 축구와 관련한 이력과 여러 희망 근무지에 수원이 적혀 있는 곳을 보고 메일 답장을 보냈다. 혹시 K리그 서포터냐며. 맞다는 답변에 이십 년도 더 된 이야기를 풀었다. 딱딱하고 정적인 메일 속, 왠지 모르게 설레 보이는 문장을 풀었다. 2001년엔 그랑블루 소모임이었고 결혼을 하고 나선 경기장에 잘 안 가는 이야기까지.


혼자 축구를 보던 사람은 나의 둘도 없는 축구메이트다. 팀에서도 존재감이 없던 선수에서 주장이 된 주인공은 매해 실력이 느는 우리 팀 주장이다. 그리고 메일로만 만난 헤드헌터가 신나게 이야기를 보낸 그 경력자가 바로 나다. 그리고 난 그에게 청백적 이모티콘을 보내며 화답했다.



많이 고민해 봤다. 뭐 하려고 이런 걸 좋아해서의 답을 찾아보려 했다. 뭐 하려고 이런 걸 좋아했지? 어떤 걸 좋아했고 좋아하지? 수원을 좋아한 이야기들, 그 수많은 서사를 돌아보다 생각지도 못한 답을 찾았다. 그랬다. 이 이야기는 결국 아빠와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휴대폰을 열고 누른다. <건강하고 행복한 멋쟁이 아빠>. 오랫동안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하는 나의 바람과 소원,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담은 길고 긴 이름이다. 신호가 다섯 번도 채 지나지 않으면 "어~"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저녁과 밤 사이에 시작된 통화는 때론 한 시간씩이나 떠들고서야 끝나기도 한다. 각자의 안부부터 정치, 문화, 스포츠 등 다양한 주제를 편견 없이 나누다 통화를 마친다.


이게 어찌 보면 내가 보여주고 싶은 나라는 사람과 아빠와의 관계에 대한 표지일지 모른다.


우리 아빠는 젊을 적 참 말이 없었다. 무뚝뚝 그 자체였다. 거실에 앉아 아주 가끔 내게 "물" 이렇게 외마디 던지곤 했다. 초등학교 때까지도 아빠랑 조잘조잘 수다를 떨어 본 기억이 없다. 부모님은 주말부부였기에 딸인 나와도 같이 보낸 시간은 짧았다. 또 군인이었던 그의 환경 때문인지 말이 많지도 다정다감하지도 않았다.


이목구비도 진하고 덩치도 큰 아빠가 귀엽게 느껴지는 지금과 아주 정반대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알면서도 놀라울 정도다.


그러던 아빠와의 첫 대화 주제가 바로 축구였다. 무뚝뚝해도, 대답을 잘 듣지 못해도 그럼에도 좋아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었나. 길게 대화를 해보리라는 오기가 생겼나. 계속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다 긴 대화가 이어질 수 있었던 게 축구였다. 아마 중학교 때겠지. 월드컵에 관심을 갖다 K리그 팀을 좋아하는 큰 딸이란 신기하며 반가웠을지도.


아빠도 그 시절 할아버지와 할머니랑 다정히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겠지. 그래서 가끔 보는 자식과 어떤 대화를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몰랐을 거다.


희한하리만큼 축구, 그리고 여러 스포츠를 좋아한 딸이 먼저 건 대화를 시작으로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마주했다. 그리고 이젠 나이차이 많이 나는 친구처럼 수다를 떨고 다정한 말을 건네는 사이가 됐다.



곧 20년 차 팬을 앞두고 있는 나의 서사는 이렇다. 책 표지는 20년 차를 강조하고 싶다. 인생에서 가장 오래 좋아해 본 무언가니까. 책을 넘기면 역사와 에피소드가 목차로 보인다.


한 장 한 장 넘기면 이런 이야기들이 나올 것이다. 한 선수에 빠져 처음 축구를 접했다. 그러다 찾아간 경기장에서 멋진 서포터즈에 반했다. 팀을 좋아하다 산업에서 일하고자 했다. 직업으로서 축구인이 되고자 했던 여러 활동들을 지나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어졌다. 그저 순수하게 팀을 좋아하는 지금에 도달했다.


그리고 비밀처럼 살짝 가려둔 챕터엔 나와 아빠의 소중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기고 지고 화려하게 해치우고 허망하게 무너져도. 때론 '뭐 하려고 이런 걸 좋아해서 스스로 힘들어하니.'라는 자책 아닌 자책을 하다가도. 결국 축구를 좋아하기로 한 나의 선택이 말해준다.


나를 만들었다. 나의 성격, 취향, 추억. 나의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을 만들었다. 이거면 충분하다. 이래서 좋아했다는 걸. 이러려고 좋아했다는 답을 나의 서사에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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