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예 Oct 20. 2024

너의 승리를 보고 싶어

그보다 더 보고 싶은 건

골을 먹히면 정적이 찾아온다. 때론 상대 팀을 향해서 또는 무기력한 선수들을 향해서 야유를 한다. 3골이나 앞서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K리그 어느 경기장에 가도 늘 보이는 패턴이다.


우리도 그랬다. "우린 우승팀이야."에서 "우린 상위권 팀이야." 그러다 "우린 1부 리그 팀이야."로 점점 바뀔 때에도 같았다. 90분 내내 노래를 부르기로 유명한 이 팀도 골을 먹히면 부르던 응원가를 멈췄다. 의도하지 않아도 허무함에 모두의 입이 자연스럽게 멈춰졌다.


심각할 땐 몇 분을 안 부르다 다시 부르기도 했다. 노래 중지 버튼이 눌리는 그 쉬는 시간에는 충격을 잊기 위해 잠시 한숨을 골랐다. 또는 상대가 골 세리머니를 하고 그 팀의 서포터들이 신나 하는 그 보기 싫은 장면을 흘기며 봤다.


재밌게도 우리의 성적이 떨어질수록 그 쉬는 시간은 점차 짧아졌다. 우승팀이 중위권에 있다며 응원 보이콧을 했던 그 옛날 드센 서포터가 해탈을 했는지 완전히 달라졌다. 과장을 보태면, 그 쉬는 시간이 사라졌다.



이젠 이렇다. 쉬지 않고 응원가를 부른다. 만약 상대가 골을 넣었다. (1초 정적). 바로 그다음 가사를 이어서 부른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대결 상대가 골을 넣으면 1초 정도는 멈칫한다. 그 1초의 느낌은 뭐랄까. '어쩔!' 또는 '흥!'처럼 느껴진다. 너네가 좋아하든 말든 우린 그냥 부를 거야. 너네가 좋아하는 소리보다 더 크게 응원할 거야! 바로 노래를 이어 부르면서도 간혹 어이없는 웃음이 나올 때도 있다.


직관*하는 사람들이라면 놀랄 이 장면을 보고 누구는 소름이 돋았다. 본인이다.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던 때였다. 귀국 후 곧이어 있는 제주 원정 경기를 친구와 함께 갔다. 그해 첫 원정이 제주도라 신나면서도 강등이 코앞인지라 걱정스러운 마음이었다. 경기가 시작됐다. 역시나 골을 먹혔다. 마침 그때, 직관을 한 시즌 가까이 쉬었던 한 팬이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직접 관람하다의 줄임말)


상대가 골을 넣은 순간, 입에선 "아-, 어후-"의 탄식이 나왔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려 했더니, 그들은 곧바로 노래를 이어서 불렀다. 그땐 뭐랄까. 악에 받쳐 부르는 응원가 같았다. 그 순간 소름이 쫙 끼쳐 눈이 동그래졌다. 친구에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친구는 당연하듯 "요새는 이래."라고 답했다.


그해부터였다. 승리를 보는 날 보다 패배를 보는 날이 많았던 해. 이러다 끝까지 가겠어했더니 진짜 끝을 본 해. '골 한두 번 먹혀보나, 그래도 응원해야지.'의 시작이 이젠 당연한 문화가 되어버렸다. 이번 경기에도 그랬다. 정말 오랜만에 1:0으로 앞서가고 있었다. 그러다 상대 편이자 작년까지 우리 팀 선수였던 그가 하필 골을 넣었다. 에라이, 네가 골을 넣은 건 넣은 거고, 우린 우리의 길을 갈 거야. 그냥 불러!



좋아하는 응원가가 있다.

너의 승리를 보고 싶어.
화려하게 해치워버려.


이기고 있을 때 이 노래가 흐르면 세상 신난 사람처럼 부른다. 현실로 다가오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일 땐 세상 처연할 수 없다. 절절한 마음이다. 대체 언제 보여줄 거니의 마음으로.


승리를 잊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이 팀의 경기를 보다 보면 가끔 상황과 다른, 그 역설적인 구호를 외치다 괜히 머쓱할 때가 있다. "우리에겐 승리뿐이다, 이 사랑에 후회는 없어, 너는 우리의 자랑 등."


밖으론 저 말들을 외치지만 미안하게도 속에선 '이 사랑.. 지금 후회하고 있어요...', '정말 자랑이 맞나...'를 속삭인다. 순애보인 척 경기란 경기를 다 따라가면서 말이다.


이날은 유독 무기력했다. 골을 먹히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골을 넣고 막는 게임이 축구기 때문이다. 우리가 뭘 시도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 장면의 연속. 상대의 계속되는 공격, 우리는 뚫지 못하는 그들의 구역. 겁이 나는지 멈칫하는 그들의 모습. 지루한 플레이에 심지어 졸리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볼을 잔뜩 돌리다 겨우 운 좋게 골이 들어가며 무승부로 끝났다. 이런 날은 비겨도 진 거 같다.



가끔 사람들이 묻는다. 놀리듯 묻는 이도 있지만 태반이 단순한 궁금함으로 묻는다. "수원삼성은 잘 하는 팀이야? 요새는 왜 못해? 왜 거기에 있어?" 등. 순수한 표정으로 묻는 그들을 보면 말문이 턱 막힌다. 질문은 결국 이렇게 흐른다. 왜 못하는 데 좋아해? 스포츠는 곧 승리를 위해 존재하는데 승리가 없는 팀을 왜 좋아하는지 궁금해한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이 정말 승리인가?


너의 승리를 보러 이 팀을 좋아했다면 이미 떠나도 할 말이 없는데. 나야말로 왜 좋아하지? 내가 진짜 보고 싶은 게 승리인 걸까?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처음은 그랬다. 우승하는 팀이었고 국가대표가 즐비했다. 이겨도 화끈하게 이길 줄 아는 팀이었다. 만일 진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냐며 화내도 할 말이 없는 팀이었다.


축구를 본 지 거의 20년이 되어간다. 수많은 경기를 봤고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이 팀을 지켜봤다. 이젠 안다. 너의 승리만 보고 싶은 것이 아니다.


휘슬이 불리기 전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 기본기가 안되면 몸으로라도 날려서 막으려 하는 투지가 보고 싶다. 넘어져도 툭툭 털고 금세 일어나 달리는 열정을 보고 싶다. 뺏겨도 골문을 뚫으려고 막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승부욕을 보고 싶다. 상대가 매섭게 계속 공격해도 수비공격 할 것 없이 우리 골문을 지키려고 머리라도 들이대는 그 모습이 보고 싶다. 져도 멋지게 지는 걸 보고 싶다. 


이럴 때 떠났다. 팬이 아닌 심판에게 보여주는 경기를 할 때. 넘어지고 나서 휘슬 불어주세요 하며 심판을 쳐다볼 때. 순위는 더 높고 승리는 더 많았지만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잠시 애정을 접었다.


마음이 식어간다. 팬들은 골이 먹혀도 아랑곳 않고 응원가를 부르는데 선수들은 포기한 듯 쳐진 플레이를 할 때. 아무리 이겼어도 무기력했고 운이 좋아 이겼다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거 원 없이 하다 지면 그래도 속이 시원하다. 박수가 절로 나온다.



2부 팀이 1부 리그 상위 팀과 컵대회 경기가 열린 날이었다. 유니폼을 입은 우리를 보고 흥미를 가진 카페 사장님이 물었다. 스코어 몇 대 몇으로 생각하냐고. "오늘 멋지게 지는 거 보러 온 거예요!"라고 당당히 말했다.


그리고 정말 멋지게 졌다. 어린 선수들은 겁 없이 돌진했고 몇몇의 고참은 안정적으로 그걸 잡아줬다. 서로 조화가 되어서 지고 있어도 계속 골문을 두드리고, 상대가 돌진하면 적극적으로 모두가 가서 막았다. 그렇게 졌다.


그 어떤 승리보다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알았다.


못 이겨도 계속해서 팀을 찾는 이 팬은 그냥 너의 승리를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다음을 기대하게 하는 "너"를 보고 싶어서 간다는 걸. 


지금의 우리가 어려운 수만 가지 이유를 뒤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도전하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보고 싶은 화려하게 해치우는 모습이라는 걸. 그리고 그걸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