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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ysu Nov 04. 2020

사과하지 마, 무의미해

아름다운 무의미에 대해





  세상에 유의미한 사과들이 있다. 뉴턴의 머리 위로 사과가 떨어진 후로 사과는 중력이 되었다. 선악과가 사과의 형태로 기승된 이후로 사과는 욕망이 되었다. 사람들은 평소에 사과꽃을 보지 못해도 아침 사과를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피부에 좋다는 의미로, 건강에 좋다는 의미로, 친근함과 싱그러움의 상징으로. 우린 사과의 꽃이 영글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 나는 보지 못했다. 사과 농사꾼의 딸이 아니었기에. 채소 장사를 하는 할머니의 손녀였기에. 이미 다 자란 채소들이 뽑혀 진열된 것부터 보았기에.  나는 할머니가 왜 채소만 파는지 궁금해하고 납득하길 반복했다. 옆 가판대의  과일 장사 아주머니가 할머니에게 성질을 내면 뜬금없는 말을 했다. 저 사람은 사과해야 할 일이 많아서 사과를 많이 팔고, 할머니는 포기를 몰라서 배추를 파나. 할머니는 알게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나는 되려 할머니의 웃음에서 공허함을 느꼈다. 옆에서 버럭버럭 소릴 질러도 꿋꿋이 할 일 하는 굽은 등. 당장 그 등을 지켜주지도 못하는데 나는  왜 존재하나. 세상에 쓸데없는 것들이 넘쳐났다. 지킬 힘도 없는 손녀와 미안해 할리 없는 사람에 대해 용서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허무했다. 용서란 어쩜 이리도 무의미할까. 쏟아진 말들과 상처 입은 면면을 쓰다듬기에는 미약하고 불확실하구나. 쓸데없이 착해서 먼저 사과하는 사람들을 봐. 증오보다 사랑을 먼저 배워버린 씁쓸한 눈가를 봐. 멀리하고 싶은 무의미한 것들이 곳곳에 있었다. 언제까지 반복해야 할까. 그만 둘 순 없을까. 원천부터 멈출 수 있을까. 사과할 필요도 없이, 용서할 필요도 없이. 그러나 상처 입히지 말자고 모든 규율과 관계와 언어를 완벽히 숙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이란 완벽할 수 없고 완벽하지 않기에 사람이었다. 




  공허와 허무는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에서 가장 두려운 가치 개념이다. 허무와 공허를 메우려면 완벽히, 빈틈없이 유용해야 한다. 하지만 사과를 하고 난 후의 결과는 상대방의 마음에 달린 일이다. 100퍼센트의 확률이 아니다.  숫자에 연연한 관계는 불안정하다. 완벽한 숫자가 아니면 모두 삭제되어야 할 기록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 개념을 불완전한 사람에게 적용시키니 파-국이다. 




  불(不)은 불(火) 같은 때가 있다.  우린 종종 불이 살갗 가까이 있을 때처럼 불안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불안한 상황, 불안한 마음, 불안한 사람, 아니면 불안 자체에서 도망치고 숨고 싶어 진다.  화염이 다가오고 숨이 막히니까. 산불 한가운데에 던져진 코알라처럼. 털이 타고, 귀가 타고 코가 탄다. 우리에게 남은 건 작은 물 웅덩이와 언제 타버린 나무가 덮칠지 모르는 길목과 마른지 알 수 없는 우물이다. 




  도망치다가도 싸우고 싶을 때도 있다. 거대한 화마에 자그만 손을 모아 쥐고 물을 담는다. 담은 물은 적은데 온 힘을 다해 뿌려야 한다. 뜨거운 열기에 물은 기화되고 눈 앞은 불투명해진다. 한 번 물을 뿌리고 자욱해진 눈 앞에 의기소침해진다. 그래도 한 번 더 한다. 또 한다. 이런 무의미한 행위들을 하고 싶을 때를 용기라고 부른다. 무의미한 것을 챙기는 마음을. 우물에서 용기를 길어 올려 불에 던진다. 손을 모아 용기를 뿌린다. 나 이외에 불에 타는 이들을 찾아 용기라는 이름의 길을 달린다.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에서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바로 당신 입으로, 완벽한, 그리고 전혀 쓸모없는 공연.... 이유도 모른 채 꺄르르 웃는 아이들..... 아름답지 않나요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들이마셔 봐요, 다르델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무의미를 들이마셔 봐요.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147p, 민음사, 2014








  사과는 무의미하다. 불안정하다. 흔들리고, 무용하다. 하지만 다른 무의미한 것에서, 뜬금없는 꽃과 개그와 사람과 풍경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무의미하고 아름다운 것을 챙기는 것을 용기라고 한다면, 그것이 무의미를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이라면. 미안해, 미안해. 자꾸 사과해야지. 사과하지 마, 어차피 무의미해라고 한다면 무의미하니까 사과한다고 해야지. 용서하지 마, 알아주지도 않아라고 한다면 용서해볼래, 알아주길 바래서 하는 거 아니니까라고 해야지. 무의미한 것을 자꾸 주워야지. 챙겨야지. 사과를 주워야지. 베어 먹어야지. 사과를 머리에 맞아야지. 놀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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