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Dear Futur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nysu Dec 22. 2020

새롭고 깔끔히 닦아 놓은

사회학자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읽고






  사회학자 엄기호는 “늘 글이란 사람을 옹호하고 사회를 폭로해야 한다고 믿는”(<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21p) 그의 희망은 새로운 것이다. 유행 같은 새로움이 아니다. 사회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변할 수 없다는 자포자기의 마음보다 각자 “조금씩 새로운 인간”, “조금씩 최초의 인간이 되는”(정혜윤, <사생활의 천재들>, ebook) 것이 희망임을 이야기한다.     

 

  그의 이야기는 고통의 증언에서 고통의 곁으로 확장된 듯하다. 그가 책머리에 참고한 책에 대해 “근본에서부터 문제 제기하는 이 책들은 통째로 읽고 통째로 인용되어야 한다”(<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20p)라는 말처럼 그의 책 또한 요약하거나 내가 감히 소개할 수가 없다. 몇 번 시도해보며 한글의 빈 페이지를 채워보았으나, 억지로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으려던 것을 참았던 것처럼 힘이 들어간 글로는 이 책을 전할 수 없다는 생각만 강해질 뿐이었다.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과 나의 고통을 나눌 수 없다는 무기력감에 지쳐있었다. 욕지기를 뱉고 싶었다. 다 좆 까! 자포자기의 마음이 온몸을 지배하고 어깨가 늘어졌다. 자포자기의 어둠은 짙고 무겁다. 이마가 깊이 어두워질 때면, 엄기호의 문장을 떠올리게 된다. 포기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포기하지 않는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글 속에 ‘나’라는 주어나 ‘내가’라는 주어가 많아지면 이슬아 작가의 문장을 떠올리며 과감히 ‘나’라는 주어를 지우듯이.     


  글에는 힘이 없다는 의심이 고갤 들 때면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펼치고 싶다. 네가 부리는 위선이 역겹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마냥 울어버렸다. 그러자 네가 울어서 어색해진다는 윽박이 돌아왔다. 더 울었다. 억울한 마음보다 상대방의 마음이 더 차가워 쓰다듬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상대방이 스스로 자신을 상처 낼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울면서도 사랑한다며 포옹하고 싶다. 널 아주 좋아해서, 그런 말을 들으면 속상하지만 아주 소중한 너라서 포기가 되지 않는다고. 나는 두 번 다시 포기할 수 없다. 엄마의 사건 파일을 열람했던 순간부터. 엄마의 죽음을 직면하고, 글을 써 엄마가 드나들 수 있는 마음의 창을 내고 나서. 사회를 폭로할 용기 없이 엄마를 옹호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힘없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돌아가기엔 많은 것을 알아버렸고,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싶다. 잘 지키기 위해.     


  읽기 전후로 바뀐 것이 있다면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잘 지키는 마음에 ‘잘’에 ‘완벽’이라는 의미를 두었다. 완벽히, 든든히 지키고 싶다. 주변의 이들을 듬직하게 지켜주기 위해서는 스스로 완벽해져야 했다. 잘 쓰고, 건강을 잘 챙기고, 책을 읽으며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마음의 기저에는 ‘완벽히’ 쓰고, ‘완벽히’ 건강해야 하며, ‘완벽히’ 숙지하여 툭 건드리면 술술 나올 정도로 외우고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읽고 듣고 말하는 모든 것을 완벽히 잘하고 싶었다. 소소한 것도 중요해지면서 챙길 것이 많아졌다. 모든 것을 완벽히 지키고 싶은 마음을 품자마자 다섯 번 깨졌다. 깨지고 읽기로 한 책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였다.     


  책을 덮자마자 다시 책머리로 돌아가고, 3부의 소제목으로 돌아가 짚어보는 감각은 마치 지나쳤던 고향의 풍경이 낯설고 낯설어서 기쁜 감각과 닮았다. 어, 하며 짧게 숨을 내쉬고 허어, 하면서 숨을 깊이 들이쉬는. 눈썹이 올라가며 이마가 눌리는. 고갤 끄덕이며 뒷 목덜미가 가볍게 당기는 감각처럼. 이 감각들을 데리고 낯설고 새로운 질문을 해보았다. 과연 ‘완벽히’ 지킬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없는 것 같다. 천국의 문지기도 쉬는 시간이 있을 텐데. 쉬는 시간이 보장되어 있으니 당연히 천국이겠지. 그런데 완벽한 문지기, 완벽한 지킴이가 있을 수 있을까.      


  책의 문장과 문장을 되짚어보면서 ‘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눈썹을 들썩이며. ‘씩씩하게’ 지켜보자. 잃을까 두려운 마음에서 완벽 하고픈 마음이 흘러나왔다면, 씩씩하게 기죽지 말고 해보자는 마음으로. 거절당하는 것이야 사랑으로 돌진하는 사람들에게 빈번한 일이니까. 네가 너무 좋아. 널 보고 싶다는 말을 씩씩하게 전하고 싶다. 씩씩한 마음으로 슬픔을 잘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더 어지러워지고 더 망가져 가는 세상에 자포자기의 어둠보다, 슬픔을 포옹하며 잘 지켜보고 싶다. 걱정이 파릇파릇 자라나는 콩나물처럼 금방 자라나지만. 포옹과 글에 대한 의심이 들 때면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읽으며 다시 씩씩해지고 싶었다.      










고양이 나루가 따뜻하게 쓰다듬는 단어, 고통.


  함께 고통의 순간을 공유하며 연결되었던 이들이 떠올랐다. 한 친구에게 전화했다. 많이 보고 싶다고. 몇 달 만에 전화한 만큼 다사다난하여 나눌 일이 많았다. 난 야간 알바에서 소란스러웠던 일에 대해, 친구는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면서 겪었던 혼란스러운 시간에 대해. 이전부터 웃고 떠들며 영화며 책이며 온갖 것을 끌어와 새로운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간만의 통화는 새로운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이야기의 경쟁이 많아진 시대에 이야기로 즐거워진 수다란, 중한 것 중 귀중한 순간이었다.      


  통화 도중에 모든 것이 귀찮아져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도 나도, 자포자기의 어둠이 드리워졌던 몇 달이었다. 내가 말했다. 야, 우리 귀찮아하잖아. 귀찮음을 이기고 가자! 가자! <오발탄>도 아니고, 나는 자꾸 가자고 했다. 그때 친구가 말했다. 어디로? 친구의 말을 듣고는 뒤통수가 뿅망치로 가볍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 씩씩한 마음으로 어디로 가야 할까.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읽고 이어진 친구와의 새로운 대화. 이 대화가 없었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겠지. 그럼 어디로 가야 할까. 씩씩함 이외의 새로운 희망이 호기심으로 날아왔다. 친구와의 통화를 끝내고 미래의 내가 어디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반짝반짝. 잘 닦아 놓은 깨끗한 호기심이었다. 바래진 호기심은 잠시 쉬도록 넣어두고 이 호기심을 타기로 했다. 새롭고 깔끔히 닦아 놓은 호기심에 올랐다. 미래의 내가 어디에 있을지 궁금해하며. 엔진 소리가 제법 씩씩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주를 유영하는 밤, 슬픔은 속닥거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