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라면파티가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다. 초등 유명 강사 중 누군가가 라면파티에 대한 썰을 어딘가에서 풀었었나 보다. 우리 학교 말고 다른 학교에서도 라면파티가 줄기차게 열렸다. 보건선생님 모임에 가면 학생이 라면파티 때문에 화상을 입어 병원에 갔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집 아이들도 학교에서 라면파티 한다며 컵라면을 사들고 학교에 갔었다. 라면파티가 있는 날이면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영양 선생님은 한숨을 푹푹 쉬며
-라면이 몸에도 좋지 않는데 왜 교실에서 라면파티를 하는 거야? 애들 오늘도 급식 다 남기고, 정말 미치겠다. 몇 학년 그 선생님, 맨날 맨날 라면파티야. 도대체 학생들 공부는 언제 가르치는 거야.
라며 투덜거렸다.
그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보건교생선생님들과 5학년 보건수업 구상을 하고 있었다. 4학년 땡땡이가 담임선생님과 함께 보건실에 왔다. 얼른 일어나 학생을 보니 아이고 발 하나가 화상을 입어 완전히 빨갛게 되어있고 수포는 다 터져 있었다. 얼른 대야에 물을 받아 학생의 발을 담갔다. 담임 선생님이
-오늘 학생들과 라면파티를 하기로 했었어요. 학생들에게 따뜻한 물을 보온병에 담아 오라고 했는데 한 아이가 땡땡이 옆을 지나가다가 물통을 건드려서 물을 엎어버렸나 봐요. 땡땡이가 고개 숙이고 있어서 가보니까 물티슈로 발을 닦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해요. 선생님.
담임선생님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선생님, 괜찮아요. 일단은 보호자에게 상황을 알리고 보호자가 원하는 병원으로 가서 치료받으면 될 것 같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마음을 가다듬고 보호자에게 전화하러 보건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교장, 교감 선생님께 상황을 알렸고 교장, 교감선생님이 보건실로 오셨다. 교장, 교감선생님께서 인상을 쓰고 학생을 보고 있는데 담임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어머니께 연락이 됐어요. 어머니께서 땡땡병원으로 가면 거기로 오시겠답니다.
교장선생님께서
-그럼 급하니까 택시고 119고 부르는 것보다 교감선생님이 운전하고 보건 선생님이 같이 병원에 다녀오세요.
라고 말했다. 학생의 발을 젖은 거즈로 감싸고 붕대로 감았다.휠체어에 학생을 태워 주차장까지 가서 교감선생님 차를 탔다. 병원에 가는 길에 학생은 매우 아파했다. 손을 조금만 데어도 아픈데 얼마나 아프겠는가. 나는 학생에게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별일 없을 거라고 계속 안심시켰다.
학교에서 병원까지 8분 정도소요됐다. 교감 선생님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기로 하고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진료를 받으려고 학생을 등에 업고 병원 출입구로 들어갔다. 학생을 병원 대기의자에 앉히고 미리 적어온 주민번호로 접수했다. 접수를 마치니 교감선생님이 주차를 마치고 병원 안으로 들어오셨다.접수 후 진료를 보려고 학생을 업고 진료실 앞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는데 보호자가 왔다. 보호자는 나의 얼굴도 교감 선생님 얼굴도 보지 않았다. 인사도 받지 않았다. 교감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했다. 의사의 진료가 끝나고 학생은 깁스 신발을 신고 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진료비를 계산하려고 하는데 학부모가 멀뚱멀뚱 서있었다. 교감선생님께 진료비는 어떻게 하냐고 보호자 몰래 물었다. 그러자 교감선생님께서 바빠서 지갑을 가져오지 못했다며 나보고 먼저 계산하고 나중에 보호자에게 받으라고 했다. 할수없이 내 카드로 진료비를 결제했다. 대체로 이런 경우에는 보호자들이 치료비를 계산한다. 왜냐하면 나중에 학교에서 가입한 안전공제에 청구하여 진료비를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보호자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병원에 오지 못하는 경우에는 학교카드로 결제하면 된다. (학교는 매년 응급환자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서 응급환자 초진비를 예산으로 세워 놓는다.)
진료비 계산이 끝나자 보호자는 교감선생님께 지금 당장 담임선생님을 만나러 학교에 가겠다고 했다. 교감선생님은 난감해하시면서 그러냐고 그럼 학교로 가자고 보호자에게 말하고 나보고 학생과 함께 보호자 차량에 타라고 했다. 보호자 차량에 탔다. 보호자는 차 속에서 화가 났는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운전은 거칠었고 얼굴은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학생에게도 괜찮냐고, 아프지 않냐고 묻지 않았다. 학생은 발이 아프다고 울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울고 있는 학생이 안쓰러워
-땡땡아, 많이 아프지?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라고 말 한마디 다정하게 했을 뿐인데 보호자가
-그럼 아프지? 안 아프겠어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세요?
라고 쏘아댔다. 나는그냥 학생이 아프다고 하니까 위로한 건데 보호자가 그렇게 말하니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 학교까지 8분 거리가 80분처럼 느껴졌다.
학교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이 함께 서있었다. 학부모가 차에서 내렸다. 학생도 차에서 내렸다. 나는 학생을 또 바보처럼 등에 업었다. 화상 입은 다리로 걸으면 안 좋을 것 같아서 말이다. 보호자는
-담임 선생님 어디 있어요? 어떻게 애를 이렇게 만듭니까? 학생관리를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라고 소리를 질렀다. 교장선생님께서
-땡땡이 어머니, 일단 교장실로 갑시다. 담임 선생님은 지금 수업 중이고 이렇게 올라가면 되겠습니까? 그 마음 저 다 압니다. 일단 교장실로 가요.
라고 말하며 보호자를 교장실로 데리고 갔다. 교감 선생님이 학생을 보건실로 데리고 가라고 했다. 학생을 보건실 침상에 내려놓았다. 학생이 덩치가 있는 편이라 허리가 아팠다. 교생 선생님들은 나의 역할을 대신해 학생에게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며 학생 옆에 있어줬다.
매번 학교에서 발생하는 안전사고들.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화가 나도 일단은 병원까지 학생을 데리고 와줘서, 빠르게 응급처치 해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보호자가 오히려 나에게 화를 내니다리가 후덜 거리고 심장도 후덜덜거렸다. 괜히 학생에게 아프냐고? 물어가지고. 바보처럼 아플게 뻔한데.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한 시간가량 보호자는 교장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담임이 교장실에 갔는지의 여부는 나는 모른다. 나는 묵묵히 보건실에서 아픈 학생들을 치료하며 한 시간가량 그 학생을 살폈다. 보호자가 학생을 데리러 보건실에 왔다. 보호자는 나와 교생선생님들을 소 닭 보듯이보고 학생만 데리고 쌩하니 가버렸다. 정말 이상한 보호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교생선생님들이
-선생님, 지금까지 우리가 데리고 있고 선생님은 병원까지 왔다 갔다 했는데 저 태도는 뭐예요? 누가 보면 선생님이 학생을 화상 입힌 줄 알겠네요.
라고 말했다. 나는 교생선생님들에게는
-얼마나 속상하면 그러겠어요. 아이가 화상을 입었는데 괜찮을 보호자가 어디 있겠어요.
라고 말했지만 속으로 왕재수, 왕싸가지라고 욕을 마구 해댔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학생은 완쾌되어 학교를 잘 다녔다. 어느 날 학생을 보니 그날 내가 냈던 치료비 칠만 원이 생각났다. 다른 학생이었다면 그냥 안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학부모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돈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모든 학교에 학생들 응급환자 초진비가 예산 편성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담임이고 보건교사고 학생을 병원에 데리고 가서 진료하고 치료비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땡땡초 보건교산데요. 그때 땡땡이 치료비 제 돈으로 냈습니다. 치료비 칠만 원입니다. 학생 편에 또는 제 통장으로 보내주세요.
라고 조심스럽게 보호자에게 전화했다. 그 보호자는 지겹게 말 안 듣는 원수 같은 말썽꾸러기 사춘기 자녀 대하듯이
-선생님, 지금 보험료도 다 못 받았는데 이 상황에 돈이야기 하고 싶어요? 제가 알아서 줄 것을 지금 전화해서 돈 주라고 하고 싶냐고요?
라고 버럭 화를 내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괜히 전화한 것 같았다. 그냥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비교과 모임에서 그림책을 읽다가 우연히 이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유치원 선생님이
-선생님이 직접 주라고 하지 말고 담임선생님 통해서 주라고 하세요. 아무래도 보호자들은 담임한테는 선생님한테 한 것처럼 못할 거예요. 왜냐면 담임선생님이 잘못해서 일어난 사고일지라도 학생은 남은 학기 동안 계속 담임선생님한테 지도받아야 하잖아요. 그리고 담임 선생님이 그 파티를 한 것이 학생을 곤란하게 하려고 한 파티는 아니잖아요. 담임 선생님 잘못이 크기는 하지만 보호자가 아침에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싸준 것도 그 파티에 동의한다는 뜻이잖아요. 아마 담임선생님이 말하면 금방 돈 줄 거예요. 그런 분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해요. 꼭 돈 받으세요.
라고 말했다.
교직원회의가 있던 날 우연히 그 학생의 담임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일에 대해 말했다. 담임선생님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계좌번호와 치료비를 자기에게 알려주라고 했다. 내가 담임선생님께 말한 그날 몇 달 만에 그 치료비가 내 통장에 찍혔다.
돈을 받아냈는데 이상하게 비참했다. 그 칠만 원이 무엇이라고 그냥 주지 말지. 그럼 이렇게 까지 비참하지 않을 텐데라고 생각하고 속상한 마음을 집에서 술로 달랬다. 이런 나를 보고 남편이 비웃었다.
- 이 사람아, 그래가지고 사회생활 하겠는가? 사람이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뭘 그렇게 속상해하는가? 그냥 돈 받았으니 기분 좋게 나 용돈이나 주소.
그런 날보고 웃는 남편을 따라 하도 어이가 없어 나도 웃었다. 웃다보니 '그런 사람도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임에 갔다가 아는 선생님이 자기 지인이 이야기를 했다. 학생들과 라면파티를 하려고 하다가 학생이 화상을 입어 보호자가 매일 학생을 집까지 하교지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단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그 선생님의 지인이 라면파티 사건의 그 선생님이었다.
아이가 화상을 입어 속상했을 보호자의 마음도 이해한다. 그러나 그 사건과 관련된 보호자의 언행은 이해할 수 없다. 꼭 그렇게만 해야했을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잘 넘긴 학생 안전사고들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그 사건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그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모두의 가슴에 앙금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