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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정말 의미를 찾아야 할까

누구보다 의미를 좇아 직장을 선택한 사람이 올리는 직장선택 알고리즘

by Y percent

'미래의 내 모습 그리기' 따위의 진로 탐색 실습을 어렸을 적부터 너무 오래 거쳐온 탓일까.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의 적성을 마땅히 꽃 피울 수 있는 어떠한 운명적인 직업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은지는 꽤 오래되었다. 아무리 꿈과 직업은 다른 것이라고 하지만, 자아 실현이라는 중대한 목표에서 직업을 도저히 떼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평생 직장에 몸을 담기보다는 적절한 시기에 이직을 하는 것이 현명한 시대에서, 한 직업에서 다른 직업으로 넘어가거나 그도 아니면 동시에 여러 직업을 동시에 수행하는, 소위 말하는 'N잡러'가 성행하는 이 시대에서, 더 이상 한 사람에게 꼭 맞게 짜여진 그린듯한 단 하나의 직업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제 좋은 직업 마저도 다른 모든 가치와 비슷하게 지극히 개인화된 선택의 영역에 놓여진다. 어제의 나에게 좋은 직업, 오늘의 나에게 좋은 직업, 10년 후의 나에게 좋은 직업은 계속해서 달라질지도 모르니. 어쩌면 완벽한 직업이라는 허상에 여전히 갇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 이럴 때, 한 번 잡숴보면 좋을 "직업 선택 알고리즘"을 소개한다.




직장에서 정말 의미를 찾아야 할까?


근본적인 의문이다. 직장에서 정말 의미를 찾아야 할까? 다시 말해, 좋은 직장이라는 것을 꼭 골라야만 할까? 적당히 괜찮은 곳에서, 적당히 납득될 정도의 돈을 벌며, 직장 바깥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연료로서의 직장도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지 않은가.


시간은 제로섬이다. 직장 내의 시간을 많이 할애할수록 직장 밖의 삶은 하염없이 쭈그러든다. 삶의 가치가, 예컨대 혼자 책을 읽거나 사색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하는 것에 있는 사람의 경우 하루의 20시간을 일만 한다면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있을까. 꼭 직장에서만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좋은 직장이라는 것은 본인이 삶의 가치를 직장 안에 두느냐, 직장 밖에 두느냐로 확연히 그 노선이 변경된다.


일과 인생은 동의어가 아니다. 직업과 직장도 그러하다 - 물론 종종 필자는 그 사실을 잊고는 한다. 아마 대부분의 워커(worker)들은 같은 망각을 하지 않을까. 직장에 있는 시간이 길수록. 직업 의외의 내가 없을수록. 나로서의 자아가 사라지고 직업인으로서의 모습만 구체화되어간다. 그런데 말이다. 사실, '진짜' 내 모습이란 뭘까? 그러니까, '퇴근을 하고 침대에 파묻혀 휴대폰으로 글을 쓰고 있는 나'가 '직장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나'보다 더 진짜 나의 모습에 가깝냐는 거다. 어느 것이 원형의 나일까. 대답하기 어려운 그 질문보다는 어느 것이 더 내가 되고 싶은 나인지를 고르면 된다. 극단적으로 말해 워커홀릭이냐 워라밸이냐는 건데, 일단은 후자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정말 바라보아야 할 곳은 사실 일상이다. 일상이라는 것은 여집합. 특수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서야 마음놓고 기지개를 펼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과 노닥거리고, 주말에 하루쯤은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퇴근 후에 좋아하는 영화 한 편쯤은 볼 수 있는 그런 일상.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을 빨아들이는 곳이 바로 직장, 일이다. 직장이 일상이 되는 삶이 아니라 아직은 일상이 직장이 되지 않은 그런 때에 '워라벨'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좋은 직장이 아닌, 좋은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 일과 일생 둘 중 모두를 지키고자 하는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을 하는 이들이다. 이 경우 직업이란 하나의 거쳐가는 관문, 변태 이전의 번데기 같은 과정이다. 그렇기에 이 때 더 중요한 것은 "좋은 직업"보다는 "좋은 삶을 침해하지 않는 직업"이다.


당신은 일상을 어디까지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는가? 여집합이라는 것은 후순위라는 뜻이기도 하다. 일이 여집합이 아니라 일상이 여집합인, 일상을 가장 먼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이 정말 괜찮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직장에서 가치를 찾아야만겠다면, "내 심장이 뛰는 일"같은 유서 깊다 못해 먼지 쌓인 가치를 좇는 삶을 바란다면 아래의 알고리즘으로 넘어가보자.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아주 고전적이다. 내가 좋아하는 연인을 만날지, 나를 좋아하는 연인을 만날지만큼이나 유구한 의문. 나를 좋아하는 직장(잘하는 일)을 갈지, 내가 좋아하는 직장(좋아하는 일)을 갈지. 뭘 딱히 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아는 그 정도 경력의 직업인으로서 이 둘은 특별히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 일을 잘하게 될지 어떨지를 알 수나 있단 말인가. 먼 발치에서 본 직무는 막상 그 일을 시작할때와는 너무도 다르다. 요구되는 능력치도, 필요한 시간도. 사실 좋아하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정말 이상한 것은 그마저도 분명치 않아진다는 점이다. 분명 하고 싶었던 일인데 막상 시작하면 시작하기 전의 일상이 강렬하게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과거의 일이 가지는 그 특수한 미화를 제쳐놓고서라도 말이다. 역시 일을 하지 않고는 이 공허감을 견딜 수가 없어, 라는 생각을 했던 게 아주 먼 과거의 일 같고 제대로 잠이나 좀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바둑판처럼 교차한다.


그렇지만 시간은 어떻게든 지난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경력도 어찌저찌 쌓인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그 둘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정말 좋아하던 일이라도 미숙하면 계속하기 싫어지기 마련이고, 흥미가 없던 일이더라도 계속해서 파고들면 결국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게 된다. 누가 처음 좋아했던, 연애를 시작하면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게 되는 것처럼. 그러니 중요한 것은 최소한의 역치를 넘는 것이다. 뛰어나게 잘하는 일이 있거나 뛰어나게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고민할 게 무엇이 있겠나. 그 곳으로 가면 된다. 그렇지만 딱히 그런 것이 없다면, 필요한 것은 배제진단이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는 초반의 어리둥절 얼렁뚱땅 시기. 그 시기를 넘길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흥미와 작은 소질이 있으면 된다. 예컨대 애매하게 잘하지만 절망적으로 흥미가 없는 일을 할바에야 중간 정도의 흥미와 중간 정도의 소질이 있는 일이 낫다는 의미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또 모르는 일이다. 막상 가보니 해당 업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을지도.



꼭 그 직업이어야만 해?


사회에 이바지한다던가, 다른 사람의 삶에 행복을 남긴다던가. 그런 직관적인 이유가 직업을 고를 때에 꽤나 큰 영향을 미친다. 직업을 처음 고민할 때의 나이는 대개 동심을 잃지 않은 어린 나이이므로. 막상 일을 시작하면 그 바깥에서 꿈꿨던 이유는 몹시도 사소해진다.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이 일을 주어진 시간 내에 해결할 수 있는지가 조금 더, 아니 많이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건빵 속 별사탕처럼 가끔이지만 분명하게, 처음의 이유를 떠올리게 하는 순간을 중간중간 마주하고는 한다. 그 분명한 순간 속에서 퍼뜩 느껴지는 행복감을 무시할 수는 없기에 이런 낭만적인 이유도 분명 고려해야만 한다.


종이를 펴보자. 그리고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 직업을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를 써보자. 현실적인 이유여도 좋다. 왜 꼭 그 직업이어야 하냐는 의문은 꼭 '그 직업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묻는 은 아니다. 꼭 그 직업이 아니어도 된다는 대답도 하나의 대답이 된다. 해당 직업이 아니더라도 공통된 가치와 공통된 만족감을 주는 다른 직업이 있다면 초반에 서술했던 N잡러나 이직도 충분한 선택지가 되니까.


개인이 직장에 바라게 되는 점은 모래알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래서 내로라하는 대기업도 직장인들의 퇴사를 막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본인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안정감? 명예와 부? 그럴듯해 보이는 직함? 그도 아니면 성취감이나 봉사심? 개인의 욕구를 가장 잘 채워줄 수 있는 곳이 바로 최고의 직장이다. 그런 직장이 여러 곳이라면 이보다 행복할 수 있나. 집에서 가까운 곳을 고르면 그만이다. 너무 개인주의적인 알고리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두가 대의를 좇으며 직업을 고를 수는 없다. 대의를 좇는 것이 행복인 사람이 그런 직업을 고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너무 이기적인가.


태어나면서부터 지니는 역사적 사명이라던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고유한 재능 같은 것. 소소한 모래알같이 파도에 떠내려가지 않고 태어난 김에 작품 하나 만들어보려는 마음가짐.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이런 미련한 고민을 하며 이 주절대는 알고리즘을 읽고 있었을 터다. 사실 아직은 사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일하는 동안 하나쯤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길 방법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 믿는다. 천년의 이상형을 찾아 헤매는 미련한 사람처럼.


이건 그러니까, 이미 직업을 선택한 뒤에도 스스로에게 되묻는 자아성찰문이다. 그런데도, 이 수많은 다른 선택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처음 품었던 그 작은 이유로, 이 일을 하고 싶은 게 맞는가. 아직은 그 '의미'라는 것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필자는 그 간간한 의미의 덫 때문에 오늘도 이 자리에 하루 더 머무르기로 했다. 일단은 그것으로 되었다. 어느 날 다른 마음이 든다면, 그때는 미련 없이 떠날 시간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 본 포스팅은 아트인사이트에 동일하게 기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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