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9] 13코스 ‘남에게 기대지 마세요’
가끔 그런 날이 있지 않나? 운수 좋은 날.
오늘은 진짜로 피곤한데 진짜로 운수 좋은 날이다.
이틀 연속 걸은 덕분에 이틀째 6시 30분에 기상했다. 어제 5시간 동안 보고도 질리지 않은 채소밭 안에 자리 잡은 숙소에서 평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나무에게 인사도 하며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했다.
그런데 신용카드가 안보였다. 뚜벅이의 고뇌, 1g의 무게라도 줄여보겠다고 하나만 가져온 나의 유일한 교통카드인데! 어제 마지막으로 결제한 편의점은 30분 거리에 있었다. 전화를 했지만 없는 번호라고 뜨고, 택시는 계속해서 최대거리 16분 호출 중이고…
오늘의 올레 13코스 시작점까지 가는 버스는 1시간에 한 번 있어 빠른 선택이 필요했다. 카드가 있을 곳은 편의점밖에 없다는 믿음 하에 원래 계획대로 8시 버스를 타기 위해 좀 전에 여유로움은 집어던지고 부랴부랴 세수만 하고 혼신을 다해 30분을 뛰었다. (여유로움을 던질 때 백팩도 집어던질 걸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내 신용카드는 편의점에 없었다. ㅠㅠ 주머니를 뒤지니 현금은 빵 사 먹고 남은 1200원이 다였다. 철판 깔고 점장 아주머니로부터 현금을 빌려야 하나 고민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터벅터벅 어제 잠깐 앉아 있던 콘크리트 도보블록에 다시 앉아 호흡부터 골랐다.
그런데 이럴 수가. 바닥에 떨어진 낙엽 사이 나의 빨간 신용 카드가 아침에 내린 비로 샤워까지 하고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게 아닌가! 연신 ‘대박’을 외치며 이번 달 가장 큰 행복을 느꼈다. 아직 7시 50분. 전날 빵을 사고 백팩을 맡기기로 한 빵집까지 또 10분을 뛰어갔다. 그리고 1분 후 버스가 도착했다. 그렇게 올레 시작점에 원래 계획보다도 빠른 8시 15분에 도착했다. 몸은 벌써 피곤했지만 정신은 어느 때보다 살아있었다. 오늘은 정말 운수 좋은 날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지금까지 걸은 올레코스 중 최고의 내륙 코스를 만났다.
13코스는 역코스로 진행했다. 이것도 최고의 선택이었다. 시작 스탬프를 찍고 이제 좀 걸어볼까 하면 곧바로 이번 코스의 유일한 오름인 ‘저지오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저지둘레길과 정상둘레길, 두 갈래길이 있는데 이젠 동전 던질 일도 없이 정상 둘레길을 선택했다. (나의 행복 최대치는 힘든 성취감에서 온 다는 것을 지난 걷기 여행에서 알았기 때문이다.) 200M 정상에서는 바다가 아닌 산과 나무가 보였고, 나에게 빨리 걸어오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아침 일찍 시작한 덕분에 어제보다 한가하고 여유롭게, 다시 한번 자유로운 외로움 속 혼자 걷는 위대한 힘을 느끼며 발걸음을 떼었다.
11코스는 묘비 다음 묘비, 12코스는 채소밭 다음 채소밭, 그리고 13코스는 숲 다음에 숲이다. 아스팔트가 거의 없었다. 지금까지 걸은 내륙코스 중에서 가장 흙을 많이 밟는 코스로 평온의 끝판왕이었다. 정말 너무 평온했다. 어제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목적에 달렸다’는 깨달음을 얻고, 오늘 걷기 전에 걷는 이유를 나름 생각했었다. 오늘은 나만을 위한 시간, 누군가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스스로 평온을 얻기 위해 걷기로 했는데, 안성맞춤 코스였다.
몇 시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너무 평온했던 탓일까, 역시 복잡함에 익숙해진 내 머리는 질문을 던졌다. ‘오늘의 목적은 알겠고, 그럼 내 삶은? 내 인생의 목적은 뭐야?’ 오늘 걷는 이유는 평온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삶의 목적도 평온함인가?
‘그럼 나는 왜 살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제일 평온할 텐데? 이왕 태어난 김에 사는 거야 나?! 나는 여기 왜 있는 것일까.’
사회 신입생이 된 마음으로 회사 신입사원들 교육 때 자주 쓰는 프레임을 떠올리며 머릿속에 동그라미 세 개를 겹쳐 그렸다. 나, 내가 속한 사회, 그리고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족. 각각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하게 생각하니 모두 행복은 원할 것 같았다. 세 동그라미가 모두 원하는 행복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삶을 사는 상상을 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거창하게 ‘행복 전파자!’라고 나만의 인생 미션 슬로건을 마음속에 정하고 벅차지 않은 척 태연하게 계속 걸었다.
그렇다면 세 동그라미가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순간 회사 업무들이 훨씬 더 쉽고 간단해 보였다. 이게 걷기의 숨겨진 긍정효과이다…) 남을 위한 행복 자체를 생각하니 답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나부터 행복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평온한 나는 행복했다. 평온이 행복인 것인가. 그렇다면 왜 두 단어는 두 단어로 존재하는 것일까. 쉽지 않은 질문이라고 스스로 핑계를 대며 잠시 앉아 동그라미 옆에 네모를 그렸다. (발표를 앞둔 행복 주식회사 사장이 된 느낌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평온과 행복의 차이점은 두 가지인 것 같다. (적어도 오늘 기준으로)
첫 번째는 타인과 나, 그 원천이 누구일까. 진짜 행복은 다른 사람을 통해 생겨나고 배가 되는 것이라면, 평온은 내가 나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지 않을까. 평온에 있어서는 오롯이 내 마음만이 절대 권력자다. 내 마음가짐에 따라 나에게 평온함을 줄 수도 뺏어갈 수도 있다. 그리고 평온은 찐 행복의 전제 조건이 아닐까. 나에게 평온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행복은 짧게 식는 쾌감에 더 가까웠다. 그 쾌감이 식으면 또 행복을 느끼기 위해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하려고 하고, 그러면서 오히려 평온과 행복, 둘다에서 멀어져 갔던 것 같다.
다음은 현재와 미래. 평온은 현재, 지금 나의 상황과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면 행복은 막상 내가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보다 미래에 일어날 그 순간을 상상할 때 더 행복하다. 소개팅이나 마시멜로 이야기처럼. 즉, 나는 미래를 위한 행복 패스포트 전에 일상에서 나 스스로가 평온해지는 연습이 필요했다.
오늘의 걷기는 처음으로 행복이 아닌 평온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 행복 전파자의 삶을 살고 싶고, 행복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부터 평온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올레 13코스 끝자락에서 동네 할머니가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계셨다. 내 마음은 평온했지만 얼굴은 지쳐 보였나 보다.
“아니, 왜 고생을 돈 내고 해” 라며 뭐라고 하셨다.
“할머니도 행복하시게 해 드리려고요!”
말이야 방구야, 말해놓고 민망함에 서둘러 뛰어가는데 당황의 웃음인지 귀여워하시는 웃음인지 여하튼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 벌써 오늘 행복을 전파해 버린 건가? ㅎㅎ’
최고의 숲 속 코스에서 인생 처음으로 평온에 대해 생각도 하고, 마지막으로 할머니도 웃으시고. 내 마음이 평온해서일까 오늘은 정말 운수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