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남 잘못도 내 잘못
내일 내시경이 예정된 환자였는데, 다음 날 아침 식사 처방에 금식 해제가 들어가 있었다. 내시경은 필히 금식해야만 가능하다. 처방을 확인하자마자 주치의에게 물었다. A 환자 내일 내시경인데 금식 해제하고 식사하는 거 맞아요? 주치의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처방대로 하세요.
찝찝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렇게 하기로 했다. 똑같은 것을 두 번 물었다가 왜 또 묻냐며 갈등이 생긴 적도 있던 주치의였다. 처방대로 식사를 발행했고 다음 날 아침 난리가 났다. 예상 가능한 소동이었다.
내시경 하는데 밥 넣은 사람 누구야?
스테이션에서 그가 광분한 목소리로 간호사들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내가 대답했다. 선생님이 처방대로 하라고 하셨잖아요. 진심으로 짜증이 났다. 처방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오류다. 나는 재차 확인까지 한 후 오류 없이 일을 진행시켰을 뿐이었다. 그는 내 대답에 눈을 부릅뜨고 나를 응시했다. 나도 똑같이 쳐다봤다. 그는 이내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나 역시 내 자리에서 하던 기록을 마저 하려고 키보드에 손을 올리는데, 뒤통수에서 작은 목소리로 끊임없이 쌍욕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주어는 없었다. 스테이션의 분위기가 가라앉았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울려 퍼지는 욕지거리 사이에서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하여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저 무시하고 내 일에 집중했다. 그게 현명한 처사라는 것을 알았다. 을의 상황은 아주 익숙했다.
이번에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고 했다. 상처를 안 받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제는 꽤 무뎌졌다고 생각했다. 멀리서 상황을 관망하던 높은 연차의 간호사가 나에게 오더니 자세한 상황 설명을 해달라고 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녀가 말했다.
의사가 그렇게 말했어도 네가 한번 더 물어보지 그랬니. 나였으면 너처럼 안 했을 것 같다.
이 한 마디에 나는 무너져 내렸다. 처방을 보고 한번 더 확인했으며 오류 없이 일을 수행했다. 이 문제에 내 책임은 없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선임 간호사는 간호사의 책임이 아닌 것 마저 나의 책임으로 돌렸다. 차라리 교수나 다른 의사가 그랬다면 이렇게 상처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억울한 것은 똑같았겠지만, 같은 간호사의 차가운 말은 내 서러움을 가중시켰다. 간호사가 이렇게 많은데 왜 내 편이 없지? 같은 간호사면서 왜 간호사의 편이 되어주지 못하는 걸까?
업무를 수행하다 보면 의료진 여러 명이 연속해서 확인하는 과정을 거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다 어느 날 과정에 오류가 생겨 문제가 생긴 적이 있다. 나와 선배 간호사 둘 모두 확인 과정에서 누락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환자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절차적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저지른 실수에 대해 공유했다. 부서장에게 사건의 경위와 문제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했고, 부서장은 앞으로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사건의 경위와 문제를 예방하기 위한 방법을 구상하여 직접 부서 내 메일로 한번 더 공유하자고 했다. 후배인 내가 그 과정을 담당했다. 그래서 나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메일을 전송했고, 곧 비난의 말이 쏟아졌다. 문제를 일으켜서가 아니라, 그 사건의 짐을 선배와 나눴다는 데에 방점이 찍혀있었다. 그 내용에 선배 간호사를 가리키는 언어는 없었고, 다만 2명의 간호사가 연속하여 누락했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너는 그냥 네가 혼자 확인 과정 누락했다고만 쓰면 될 것이지 굳이 2명이 누락했다는 말을 왜 붙였니? 그렇게 선배를 탓하고 싶었니?
당사자인 선배는 별 말 없었지만 다른 선배들은 이 메일을 매우 불쾌해했다. double check을 누락한 게 사건의 핵심이자 메일의 주제였으니 어차피 나 혼자만의 실수가 아니라는 것은 모두 제목만 봐도 추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용에는 내 이름만 떠있었을 뿐 선배 이름은 감히 쓰지도 못했다. 그런데 '2명'이라는 가능성을 암시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분노했다. 감히 후배 주제에 선배의 허물을 들춰낼 여지를 남겨? 그럴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의도와 상관없이 조직에서 건방지고 매너 없는 후배가 되었다. 혼자 보고서 쓴 것도 억울한데 비난까지 떠안으니 죽을 맛이었다. 또 한 번의 퇴사 욕구가 요동치며 올라왔다.
*두 경우 모두 실제로 겪었던 경험을 재구성한 것이긴 하지만, 좋은 의사나 간호사도 많다.
억울함만큼 사람을 힘들게 하는 감정은 없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포용할 만큼 성인군자스럽지 못하다. 나는 일개 소시민이다. 동료들은 평균적으로 한 달에 열흘 쉬는데 혼자 7일만 쉬면 슬퍼하고, 환불 불가능한 물건을 샀는데 그다음 날 할인을 시작하면 배 아파한다. 평범의 영역 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조직이 성인군자나 현자들로만 구성된다면 불만도 갈등도 없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런 조직은 없다.
당시 조직에서 나는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던 것 같다. 불합리하게 욕을 들어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스스로를 탓해야 했고, 남의 잘못까지도 내 잘못으로 떠안을 수 있어야 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더라도 문제를 삼으면 군말 없이 잘못했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편 없이 사회적으로 소외될 것 같았다. 나는 너무나 사회적인 동물이라 외톨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답답하고 억울한 감정들은 저 마음 깊숙이 쌓여갔다. 시간이 지나고 억압된 자아는 한계에 도달했다. 내가 이직을 결심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처음 프리셉터(직장에서의 사수)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을 때 들었던 말이다. 당시에는 인상 깊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구절이다. 내가 머물던 조직에는 멋지게 일을 잘 해내는 선배가 많았다. 대부분 대단한 경력과 엄청난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난 그들을 존경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전부 닮고 싶지는 않았다. 롤모델이란 자고로 자신이 되고 싶은 미래 모습의 반영이다. 나는 아마 서로의 편이 되어주고 다독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선배들도 한때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다만 실천이 쉽지 않다. 내가 근무하는 동안에도 많은 후배들이 사직했다. 나 역시 좋은 선배로 남고 싶었으나 그들의 롤모델이 되는데 실패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개인의 실패가 아닌 조직의 실패로 본다. 거대한 문화의 힘 속에서 개인은 무력하다. 단단하게 짜인 조직 문화 안에서 개인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시류를 따를 수밖에 없다. 이직률을 낮추려면 존경할만한 롤모델을 만들어야 하고, 그런 롤모델은 좋은 문화 안에서 태어난다. 문화를 정착시키려면 오랜 시간과 자본을 투자해야 하지만, 문화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우리는 아직도 스스로 두 눈을 가리고, 이직을 나약한 개인의 탓으로 돌리며, 실효성 없는 정책만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도 병동의 한 구석에서는 또 다른 간호사가 이직을 고민하고 있다.